
고산서원(안동)
이 서원은 18세기 유학자인 문경공 대산 이상정선생을 추모하는 고산서원이다. 1789년(정조 13)에 사림의 공의로 건립되었다. 선생은 25세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거쳐 공조참의에 제수되었으나 사퇴하고 퇴계의 학통을 계승하여 성리학을 연구하는 한편 후진을 양성하였으며 선생의 문인록에 등재된 제자만도 273인이나 된다. 1882년(고종 19) 이조판서에 증직 되고 1910년 문경공이란 시호가 내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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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서원은 18세기 유학자인 문경공 대산 이상정선생을 추모하는 고산서원이다. 1789년(정조 13)에 사림의 공의로 건립되었다. 선생은 25세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거쳐 공조참의에 제수되었으나 사퇴하고 퇴계의 학통을 계승하여 성리학을 연구하는 한편 후진을 양성하였으며 선생의 문인록에 등재된 제자만도 273인이나 된다. 1882년(고종 19) 이조판서에 증직 되고 1910년 문경공이란 시호가 내려졌다.
조선 명종 때의 진사 정소를 추모하고자 숙종 38년(1712)에 순천유림인 조구년, 유책, 임진상 등이 발론하여, 정소의 형 정자와 지우인 조대성을 함께 배향하는 사우로 정소의 유지인 청사헌 자리에 건립하였다. 원래 이름은 정소의 호를 따서 청사사라 하였으며 현 순천시 저전동의 청사헌 자리에 있었다. 청사사우 때와는 달리 재건된 후에는 정소와 조대성만을 향사하고 있다. 곡수서원 앞에 네모난 형태의 아름다운 연못이 조성되어 있다.
계송서원은 전남광주통합특별시 영광군 계송리에 위치한 서원이다. 1966년 향내 유림의 발의로 하동 정간, 미산 정례손 등의 절개와 의리를 추모하기 위하여 현 소재지에 사우를 창건하고, 처음 이를 도내사라하고 제향(각종 제사 의식) 해 오다가 후에 계송서원이라 개액하였다. 향사는 음력 2월 20일과 8월 20일에 모신다. 주변 관광지로는 우산근린공원, 영광예술의 전당, 영광 스포티움, 영광향교, 물무산 등이 있다.

공의로 김지대(1190~1266)의 충효를 기리기 위해 현재의 경상남도 밀양군 청도면 두곡리에 남계서원을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사당의 명칭을 충효사라 하고 선현 배향과 지방 교육을 담당하다가, 고종 51년(1868)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 위패는 뒷산에 묻고 단을 세워 향사하다가, 1907년에는 후손들이 강당인 쌍수당을 중건하기도 하였다.

고로서원은 충청남도 공주시 사곡면 호계리에 있는 조선 후기에 세운 정분(鄭苯)과 정지산(鄭之産)을 배향하는 서원이다. 1924년에 제각(祭閣)인 경모재(敬慕齋)를 축성하였고, 1931년에 대대적인 중수를 하였다. 이때 우연히 부여의 외산(外山)에서 정분의 영정을 발견하자 이를 모사하여 사당에 모시게 되었다.
계담서원은 순흥 안 씨 선조들을 제향 하는 곳으로 괴산군 감물면 계담마을 중심에 위치해 있다. 1824년(순조 24)에 조선 중기의 문신 안명세 선생을 모시는 계담사로 마을 뒷산에 창건했다. 계담서원은 강서당(학습실)과 학구당(도서관)이 갖춰져 있는 것이 특징이다. 계담서원 내 홍살문을 지나면 좌측에 도서관으로 이용하는 학구당이 있다. 2만 5천여 권의 책을 소장하고 있으며 인근 주민들이 언제나 대여 및 열람할 수 있다.

고산서당은 처음에 서재(書齋)로 건립되었다가 서원과 서당으로 이름을 바꾸면서 이 지역의 대표적인 유학 교육 기관이자 선현을 제향(祭享)하는 공간으로 중요한 역할을 해 온 곳이다. 건립된 시기를 정확하게 파악하기는 어려우나, 퇴계 이황(退溪 李滉, 1501~1570)과 우복 정경세(愚伏 鄭經世, 1563~1633)가 이곳에서 강론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1500년대에 건립된 것으로 보인다. ‘고산(孤山)’이라는 이름도 퇴계에게 요청하여 받은 것이라고 한다.

곤양향교의 창건연대는 명확하게 전해지고 있지 않으나 곤양군이 세종 원년(1419)에 군으로 승격되었음을 상기할 때 향교도 세종시대에 창건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 후 중종(中宗) 25년(1530)에 펴낸 「신증동국여지승람」곤양군조에 의하면 "관원은 군수·훈도 각 1인씩이다. "라는 기록을 보아도 능히 알 수 있는 일이다. 어득강이 곤양군수로 부임한 후 그의 많은 업적 가운데 특히 향학에 힘써 많은 유생)을 길러 내었다 한다.

계룡 사계고택은 조선 중기의 정치가이자 예학자였던 사계 김장생 선생이 말년에 살았던 집으로 후학 양성과 학문에 전념하던 곳이다. 약 2800여 평의 넓은 대지에 남쪽으로부터 대문채·은농재·행랑채·안채, 그리고 그 뒤에 가묘가 일곽을 이루며 배치되어 있다. 또 안채의 왼쪽 편에 나 있는 협문을 지나면 다시 안별당 건물이 있고 그 앞쪽으로 큰 연못이 있는데 이 주변에는 많은 괴목들이 우거져 풍취를 더 하여 주고 있다.
제천 와룡산의 고산사 응진전에 봉안된 나한상이다. 나한이란 아라한의 준말로, 소승불교의 수행자 중 가장 높은 지위에 있는 성자를 말한다. 사찰의 기록에 의하면 고산사는 신라 말 고려 초에 도선국사가 창건한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절에서 수습되는 기왓조각, 청자 조각 등은 고려와 조선 때의 유물이 주종을 이루고 있어 확실하게 알 수 없다. 관음보살을 중심으로, 좌우로 배치된 고산사 나한상은 조선 중기에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충청북도 제천시 덕산면 와룡산의 고산사 응진전에 모셔진 관음보살상이다. 응진전에 모셔진 관음보살상은 조선 중기에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머리에 매우 정제된 보관(寶冠)을 쓰고 있으며, 얼굴과 몸체의 각 부분도 균형미가 보인다. 다만 양 어깨가 위축되고 턱이 크게 숙여지는 등의 모습이 드러나는데, 이는 조선 후기의 불상 양식을 지닌 탓이다. 사찰에 1920년대에 제작한 중수 기록이 있는데, 이 기록에 의하면 신라말 고려초에 도선국사가 창건한 절로 나타난다.
향교는 공자와 여러 성현께 제사를 지내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해 나라에서 세운 교육기관이다. 고부향교는 처음 지은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진 것을 선조 30년(1597)에 지금 있는 자리로 옮겨 세운 것이라고 한다. 현재 남아있는 건물로는 대성전, 명륜당, 동무·서무, 직사, 내삼문, 외삼문, 홍살문 등이며, 전해오는 유물로는 제기, 제복, 서적들이 있다. 대성전은 제사를 지내는 공간으로, 교육 공간인 명륜당보다 위쪽에 있다.

임진왜란과 정묘호란에 전공을 세운 진무성 장군을 추모하기 위해 호남 유림의 발의와 영남 유림의 협찬으로 고종 19년(1882) 이전에 있던 용강사를 계승하여 건립한 것이다. 진무성은 이순신이 지휘했던 당포해전, 옥포해전 등의 여러 전투와 제2차 진주성 전투에 참전하였다. 임진왜란 때의 전공으로 선무원종공신에 책봉되었으며, 난이 끝난 후 선조 32년(1599)에 무과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이 능은 신라 제32대 효소왕(재위 692~702) 무덤이다. 신문왕(재위 681~692)의 맏아들로서 6세의 어린 나이에 즉위하였으며, 어머니인 신목태후가 8년간 섭정하였다. 효소왕의 재위 기간에 관제를 정비하고 의료 교육기관인 의학을 설립하였다. 고구려의 옛 땅을 되찾기 위해 성을 많이 쌓았고, 왕도에 물품의 유통을 쉽게 하기 위해 시장을 열었다. 효소왕이 죽은 후 망덕사 동쪽에서 장사를 지냈다고 한다. 이 능은 시가지 동남쪽 형제봉의 남서쪽 산자락에 있다.

돈대는 적의 움직임을 살피거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서 영토 내 접경지역이나 해안지역의 감시가 쉬운 곳에 마련한 초소로, 대개 높은 평지에 쌓아두는데 밖은 성곽으로 높게 하고, 안은 낮게 하여 포를 설치해 두는 시설물이다. 망월평야 남서방향의 언덕 위에 자리하고 있는 이 돈대는 바깥벽 측면에 기록이 남아 있으며, 망월돈대와 함께 관아에서 관리하던 돈대이다.
흥화문은 경희궁의 정문이다. 원래 경희궁으로 들어가는 문읜 5개로, 정문인 흥화문 외에도 동쪽에 흥원문, 서쪽에 숭의문, 남쪽에 개양문, 북쪽에 무덕문이 있었다. 창건 당시 경희궁은 창경궁 제도를 따라서 규모를 작게 하여 정문도 단층으로 세웠다. 경희궁 근처 얕은 고개를 ‘야주개’라 하였는데, 이는 흥화문의 현판 글씨가 명필이라 밤에도 빛이나 그 광채가 고개까지 훤하게 비추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전북 고창군 수동리에 있는 분청사기 가마터로, 구릉 위 작은 저수지의 경사진 언덕에 자리하고 있으며, 가마벽 부분·도자기 만들던 도구·분청사기 조각들이 널려있다. 그릇은 대접·접시·잔·항아리·큰 사발 조각이 주류를 이루며, 유약의 색은 회청색을 띠고 그릇을 빚던 흙에는 이물질이 많이 섞여 있다. 문양은 연꽃무늬, 물고기 무늬, 모란무늬들이 대범하게 그려져 있다.
향교는 공자와 여러 성현들께 제사를 지내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해 나라에서 세운 교육기관이다. 고창향교는 고려 공민왕(재위 1351∼1374) 때 월곡리에 있던 학당사을 옮겨온 것으로, 조선 중종 7년(1512)에 다시 지었다. 대성전은 선조 38년(1605)에 수리하였고, 1974년에 기와를 보수하였다. 규모는 앞면 3칸·옆면 2칸이며, 지붕은 옆에서 볼 때 사람 인(人) 자 모양인 맞배지붕이다.

경남 고성 장산리 허씨고가는 조선 고종 2년(1865)에 건축되어 허씨 4대 선조의 위패를 모신 곳이다. 사당과 안사당, 가옥 한 채와 2층 건물로 이루어진 구조로, 조선말에서 일제강점기에 걸쳐 건축된 한식 전통가옥과 화식주택이 혼합된 대표적인 가옥으로써, 건축구조형식과 건축재료 및 평면 구성이 복합적으로 표현되고 있다.

보물인 갑사 철당간·지주는 당을 다는 철깃대와 기둥이다. 당간은 절 앞에 세우는 깃대인데 부처나 보살의 위신과 공덕을 표시하고 사악한 것을 내쫓는 기능을 가진 당이라는 깃발을 달기 위한 깃대이며, 당간지주는 당간을 좌우에서 지탱하기 위한 버팀 기둥을 말한다. 갑사 철당간은 지름 50센티미터의 철통 24개를 이어 놓은 것으로 당간의 높이는 약 15미터이다. 그러나 1893년에 4개의 철통이 부러져 처음보다 낮아졌다.
고창군 무장면에 있는 무장객사는 조선시대 무장현에 내려온 관리들에게 숙식을 제공하던 곳이다. 조선 선조 14년(1581)에 건립되었다. 본관에 걸린 궐자를 새긴 나무 패는 임금을 상징하는 것으로,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 수령과 지방관리들은 여기에 경의를 표했다.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면 사람들은 이곳에 모여 축하의식을 행하였다. 본관은 돌을 쌓고 그 위에 세운 것으로 계단에 새긴 호랑이, 구름 등의 조각이 운치가 있다.

무장읍성은 1417년 무장진의 병마사에 마을을 다스리는 기능을 주어 무장진 병마사 김노가 쌓은 길이 약 1. 2㎞의 평지성이다. 읍성의 남문인 진무루는 앞면 3칸, 옆면 2칸의 2층 건물이며, 동문터도 잘 남아 있다. 성 주위를 둘러싼 물길인 해자는 폭 4m, 길이 574m 정도로 그 흔적만 남아있다. 성 안의 건물로는 객사, 동헌이 있다.

공주 우금치 전적은 1894년 동학농민군이 관군과 일본군의 연합군을 상대로 최후의 격전을 벌인 장소이다. 공주에서 부여로 넘어가는 기슭의 고개로 우금 고개, 우금재 또는 비우금 고개라고도 부른다. 우금치 고개는 호서지방의 요충지이며 중부지역의 거점으로, 충청도 감영소재지가 있는 공주 남쪽의 중요한 관문이었다. 1894년 전봉준이 이끄는 동학농민군이 반봉건과 반외세의 기치를 내걸고 죽창으로 대항한 곳으로 한국 근대사에서 매우 뜻깊은 장소이다.

황룡사는 6세기 신라시대 때 만들어져 고려 13세기 몽고의 침입으로 불타 없어진 사찰로 지금은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는 터만 남아있다. 면적 8,800평 규모에 불국사의 8배나 되는 대형 사찰로 추정된다. 왕명으로 553년(신라 진흥왕 14)에 창건하기 시작하여 566년에 주요 전당들이 완성되었고, 금당은 584년(진평왕 6)에 완성되었다. 선덕여왕 14년(645년) 탑의 건조까지 모두 완성된 황룡사는 신라의 호국 신앙의 중심지였다.
고산사는 장평면에서 남쪽으로 2km 정도 떨어진 용두산 협곡에 위치한 자그마한 사찰로 인근에는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마을은 없다. 고산사에는 전남광주통합특별시 유형문화재인 고산사 석조여래입상이 볼만하다. 경내에는 약사보전과 요사채가 있고 약사보전 안에는 고려초기 석불인 약사여래 석불이 있다. 원래는 절터만 남아 있고 석불입상은 파손된 채 땅속에 묻혀 있었는데, 1966년 새로 지은 법당 안에 모셔놓았다.

지산동 민가 안에 있는데, 그 일대가 부락으로 변하여 옛 절터를 찾아볼 수 없으나, 원위치에 원상태로 동서로 마주보고 있는 것을 미루어 당시 이 일대가 대사찰이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외면의 모서리를 죽이고 종문를 조각하여 매우 장식적이고 화려한 의장 수법을 보이고 있다. 지주의 정상부는 뾰족하고 바깥으로 내려오면서 3단의 굴곡을 활 모양의 선으로 처리하였으며, 지주의 안쪽에는 간공 두 개가 있는데 이들은 장방형의 형태로 구멍을 뚫어 간을 끼우도록 하였다.

거제 고현성은 축조당시 사등성의 인구가 늘어나자 문종 1년(1451)부터 쌓기 시작하여 2년 뒤인 단종 1년(1453) 완공한 읍성이며, 성의 둘레는 921m, 높이 4m이며, 동·서·남쪽 세 방향에 성문을 설치하였다. 성문 앞에는 반원형의 옹성을 만들어 적으로부터 성문을 완전히 보호하였으며, 성을 둘러싼 물길인 해자를 설치하여 방어를 강화한 조선시대의 전형적인 읍성의 형태이다.
황새바위 순교성지는 참수 처형으로 대표되는 순교성지이자 순교자의 처절하고 용기 있는 신앙인으로서의 삶의 모범을 통하여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신앙이 무엇인지, 신앙인으로서 무엇을 바라보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삶의 자리를 돌아보고 새로 나는 장소, 은총의 배움터이다. 박해시대 초기에는 사형 판결을 받은 사학죄인들에게 해읍정법이 적용되었는데, 이는 백성들에게 천주학을 경계하고자 사학죄인들을 출신 고향에서 공개 처형한다는 의미이다.

안동 고산정 일원은 『여지도서(輿地圖書)』에 고산[孤山]의 빼어난 경관이 기록되어 있으며, 고산의 북쪽에 성재[惺齋] 금난수[琴蘭秀, 1530∼1604]가 1564년(명종 19년)에 세운 고산정[孤山亭]이 들어서 있다. 고산정은 퇴계 이황과 금난수 등 조선시대 유학자들이 교류하며 풍류와 학문을 나눈 장소로, 역사문화적 가치가 높은 공간이며 퇴계가 유람했던 예던길과 농암종택이 인접한 가송협의 하천변 단애 아래에 위치해 있다.

당간지주는 사찰 입구에 설치하는 것으로, 절에 행사나 의식이 있을 때면 당이라는 깃발을 달아 두는데, 이 당을 꽂아두는 기다란 장대를 당간이라 하고, 당간의 양쪽에 서서 이를 지탱시켜 주는 두 돌기둥을 당간지주라 한다. 드물게 당간이 있으나 대부분 두 기둥만 남아있다. 이 당간지주는 마을 입구의 민가 뒷돌담에 서 있다. 남아있는 상태가 그리 좋지 않아서 한쪽 기둥은 잘린 채 떨어져 있고, 다른 한쪽도 파손이 심하다.
고산서원은 퇴계와 더불어 조선 성리학의 6대가 중 1인으로 추앙받는 노사 기정진이 고종 15년(1878)에 정사를 지어 담대헌이라 하고 학문을 강론하던 곳이다. 후손들이 1924년 중건하였으며, 1927년에 고산서원이라는 편액을 걸었다. 노사 기정진은 19세기 전라도 지역뿐만 아니라 멀리 제주까지 전국적인 후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진양정공 보국숭록대부 충의공 정기룡 장군의 사당이다. 정기룡의 호는 매헌이고 조선시대인 1562년(명종 17)에 출생하였으며 1622년(광해군 14) 2월 한산도 통제영에서 삼군 통제사 재임 중 세상을 떠났다. 정기룡은 무과에 급제한 뒤 임진왜란 당시 경상 우도방어사 조경 장군이 적에게 포로가 되자 구출에 성공하여 장군의 명칭을 얻었다. 그 뒤에도 크고 작은 싸움터에서 80여 회의 승전을 거듭하였다.

공림사는 낙영산 아래 자리 잡고 있는 사찰로 신라 경문왕때에 자정선사가 창건한 고찰로 알려져 있다. 자정선사가 암자를 짓고 수도하던 중 그 법력과 덕화가 세간에 두루 알려지자 왕이 선사를 국사에 봉하고 입궐을 청하였으나, 세상을 떠나온 사람이 다시 세간으로 나갈 수 없다고 사양했다고 한다. 왕이 선사의 덕화에 감동받아 왕명으로 사원을 창건하고 공림사의 사명을 지어 액자를 하사하였다고 전해진다.
고란약수는 충남 부여군 부소산 북쪽 기슭 백마강(금강)변에 위치한 사찰 고란사의 약수이다. 이 사찰은 고란초에 의해 널리 알려져 있는데 법당 뒤편에서 나오는 약수와 함께 이 사찰의 명물을 이루고 있다. 고란사는 백제 멸망과 관련된 여러 가지 전설이 저하나 정확한 유적이나 유물은 없고, 현재의 고란사는 고려시대에 창건되었는데 현 사찰 건물은 은산 승각사를 이전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곳은 인근 낙화암, 백마강 유람선과 함께 둘러보기 좋다.
계룡산신도내주초석석재는 충청남도 계룡시 신도안면 곳곳에 흩어져 있는 문화재이다. 신도안면은 조선 태조 이성계가 나라를 세운 후, 천도 후보지로 정했던 지역이다. 궁궐을 짓기 위해 1년여간 많은 사람을 동원하여 목재와 석재 등을 운반하다가, 신도안이 국토 남쪽에 치우치고 교통과 물 공급이 불편하며 풍수상 고려 개경과 유사하여 신 왕조에 불리하다는 이유로 중단되었다. 이때 대궐터에 주춧돌로 쓰려고 가져다 놓은 주초석 약 115개가 남아 전해지고 있다.
![경남 하동 악양면 [슬로시티]](https://tong.visitkorea.or.kr/cms/resource/29/3589529_image2_1.jpg)
슬로시티는 느리게 살기 미학을 추구하는 도시를 가리키는데 2009년 2월 6일 슬로시티 국제조정이사회에서 하동군 악양면이 상정되어 우리나라 다섯 번째의 슬로시티로 인증받았다. 하동 악양은 세가지의 향기가 있다. 평사리 최참판댁의 서희가 악양의 넓은 논두렁을 내려다보고 있는 것 같은 소설 속의 모습이 그대로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