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연대(함양)
함양군 백전면에 위치한 상연대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2교구인 해인사의 말사이다. 신라 말 경애왕 1년(924) 고운 최치원 선생이 어머니의 기도처로 건립하여 관음 기도를 하던 중 관세음보살이 나타나 상연(上蓮)이라는 이름을 하여 상연대로 부르게 되었다고 전한다. 창건한 이래 신라말에는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하나인 실상선문(實相禪門)을 이곳에 옮겨와 선문(禪門)의 마지막 보루가 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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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양군 백전면에 위치한 상연대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2교구인 해인사의 말사이다. 신라 말 경애왕 1년(924) 고운 최치원 선생이 어머니의 기도처로 건립하여 관음 기도를 하던 중 관세음보살이 나타나 상연(上蓮)이라는 이름을 하여 상연대로 부르게 되었다고 전한다. 창건한 이래 신라말에는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하나인 실상선문(實相禪門)을 이곳에 옮겨와 선문(禪門)의 마지막 보루가 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낙동강가 민씨 오우정(五友亭) 안에 있는 서원으로 연산군, 중종 때 학자인 민구령(閔九齡), 민구소(閔九韶), 민구연(閔九淵), 민구주(閔九疇), 민구서(閔九敍) 등 5형제를 배향하였다.

삼가향교는 조선 세종 때에 세웠다고 하며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광해군 4년(1612)에 다시 지었다. 1826년 정우용이 대성전을 현재의 위치로 이건하였으며 이때 풍화루와 흥학당을 중수하였다. 대성전에는 5성, 송조 4현, 우리나라 18현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전체적인 건물배치는 공부하는 곳인 명륜당이 앞에 있고 제사를 지내는 곳인 대성전이 뒤에 있는 전학후묘의 형태이다.

지은 시기를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전하는 말에 따르면 약 70년 전, 조선 말기에 지은 것으로 추정한다. 마을 외곽을 도로가 두르고 있는 형태로 구성되어 있었다. 측면의 집과 대지가 나뉘는 형태 때문에 대문을 지나 폭이 좁은 담장사잇길을 지나도록 되어있다. 한 칸으로 구성된 가옥의 첫 대문을 지나 보이는 대문채가 인상적인데, ㄱ자로 꺾인 부분이 맞배지붕으로 구성되며 대청이 만들어져 있어서 사랑채 용도로 사용되지 않았을까 추측된다.

조선 중기의 유명한 유학자인 조식 선생의 유적지이다. 조식 선생은 많은 벼슬이 내려졌으나 모두 거절하고, 학문연구와 후진양성에 평생을 보냈다. 조식 유적은 두 곳으로 나뉘는데 사리(絲里)에는 산천재, 별묘, 신도비, 묘비가 있고, 원리(院里)에는 덕천서원과 세심정이 있다. 산천재는 선생이 학문을 닦고 연구하던 곳으로 명종 16년(1561)에 세웠고, 순조 18년(1818)에 고쳐졌다. 규모는 앞면 2칸, 옆면 2칸이다.
도천서원에 모시고 있던 청향당 이원과 죽각 이광우를 따로 모시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이원은 조선 전기의 학자이며, 이황 선생과 학문의 뜻을 같이 하였으며, 1546년에는 나라에서 벼슬을 내렸으나 거절하고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배산서원은 1771년에 덕연사만 세워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냈으나,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에 철거되었다. 그 뒤 1919년에 새로 지어 배산서당이라 하였다.
산청·함양사건 추모공원은 산청·함양사건 희생자 합동 묘역이다. 한국전쟁 중이던 1951년 2월 7일 국군 11사단 9연대 3대대가 지리산 공비토벌 작전인 ‘견벽청야’를 수행하면서 산청군 금서면 가현, 방곡마을과 함양군 휴천면 점촌마을, 유림면 서주마을에서 무고한 민간인 705명을 학살하였던 바, 이때 억울하게 희생된 영령들을 모신 묘역이다.
단성향교는 1127년에 유(賢儒)의 위패를 봉안, 배향하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하여 창건되었다. 서쪽 산기슭으로 옮겼다가 1752년에 현 위치인 교동으로 옮겨지었다고 전한다. 경사지에 위치하여 앞쪽에는 공부하는 공간인 명륜당이, 뒤쪽에는 사당인 대성전이 있는 전학후묘의 배치를 이루고 있다. 정문인 관선문을 들어서면 누각형식의 명륜당이 있는데, 대청 아래를 통하여 들어가도록 되어있다. 명륜당 밑을 통하여 내삼문과 대성전의 지붕이 겹쳐서 보인다.

단계마을의 옛 담장은 토석담이 주류를 이루며 전형적인 농촌 가옥들과 어우러져 독특한 풍경을 이루고 있다. 담 높이는 2m 정도로 큰 돌만 이용하여 메쌓기를 한 후 위에 좀 더 작은 돌과 진흙을 교대로 쌓아 올렸다. 담 위쪽에는 기와가 흘러내리는 것을 막기 위해 넓고 평평한 돌을 담장 안팎으로 6~7cm 정도 내밀게 했다. 인근 관광명소로는 산청 산골 박물관, 월명산 등이 있어 함께 둘러보기 좋다.
향교는 훌륭한 유학자를 제사하고 지방민의 유학교육과 교화를 위하여 나라에서 지은 교육기관이다. 조선 세종 3년(1421)에 세워 유교를 공부했던 곳이다. 세종 22년(1440)에 향교 관계자들의 거처인 치성재, 학생들의 거처인 동·서재, 공부하는 장소인 명륜당, 휴식공간인 풍화루를 새로 지으면서 이름을 ‘수학원학사서재’로 바꾸었다.
경상남도 사천시 사천읍 선인리 일대에 있는 사천읍성은 돌과 흙으로 쌓은 성곽으로, 약 1. 5㎞의 둘레 중 현재는 3개 부근 약 300m의 성곽이 남아있다. 사천의 옛 이름이 사물(史勿), 사수(泗水), 동성(東城) 등이었는데 조선 태종 때부터 사천이라 하였다. 세종 24년(1442)에 병조참판 신인손이 왕명에 의해 쌓았다고 전해지며, 이곳에 돌로 성을 쌓기 시작하여 3년 후(1445)에 완성시켰다. 이로부터 4년 뒤 관청을 짓고 읍을 옮겼다고 한다.

조선 후기의 승려 유정(사명대사)이 태어난 곳이다. 사명대사가 1544년(중종 30)에 진사 임수성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13세 때 가출하여 직지사 신묵에게 가서 승려가 될 때까지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이다. 사당인 숙청사와 사명대사가 태어나서 자란 곳인 육영당, 사명대사가 거처하던 사랑채인 사명당 등이 남아있다. 사명대사는 어린 시절을 여기서 보냈으며 많은 일화가 전해오고 있다.
대한불교 법화종 소속 사찰로, 창원시 비음산 남쪽 기슭에 자리하고 있는 전통 사찰이다. 불곡사의 창건 연대를 알 수 있는 사료는 없으나, 창원 지역에서 구전되는 설화나 『한국 불교 사찰 사전』에 따르면, 통일신라시대에 국사 진경(854~923)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한다. 1929년 우담 화상이 옛날 절터에 드러나 있던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을 파내어 비로전에 모시고 다시 사찰을 세웠다.

보현암은 경남 고성군의 수태산에 있는 사찰로 13m 높이로 우뚝 솟은 금동 약사여래 대불이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산 중턱에 있어 경치가 좋고, 사찰 뒤쪽으로는 바다도 보인다. 특히 가을에는 산을 물들인 알록달록한 단풍이 커다란 불상과 어우러져 장관을 이룬다.
대한불교 조계종 제12교구인 해인사의 말사로서 1912년에 벽송사 주지 스님 김동운 화상이 건립하였다. 1929년 관내 6개 사찰이 연합 운영하면서 포교 사업으로 유치원을 운영한 바 있으며 1970년 조영산 화상이 부임하여 보림사라 개칭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1971년 사찰을 개축하고 1972년에는 불교회관을 건립하였으며 함양읍 시가지 중심부에 있어 포교 활동을 통한 불교 진흥에 크게 기여하고 있는 사찰이다.

법흥사는 봉강산 자락에 위치하고 있으는 절로, 1900년경 남해 용문사와 화방사가 합동으로 지금의 남해읍 사무소 자리에 중건하였다가 남해향교 옆 현 포교당으로 이전했다. 법흥사는 남해 불교와 불교 대중화의 산실이다. 남해의 중심지에 위치하고 있어 어린이부터 성인 모두를 대상으로 포교활동을 펼치고 있다.

대한불교 조계종 제12교구인 해인사의 말사로 창건연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절 뒤쪽의 창건 당시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 3층 석탑으로 미루어 볼 때 그 시기를 신라말이나 고려 초로 보고 있다. 1520년에 벽송 지엄대사가 중창하여 벽송사라 하였다고 전한다.
반곡서원은 우암 송시열선생이 1679년(숙종 5년) 거제도로 귀향을 왔을 때 머물렀던 곳에 세워진 서원이다. 거제 유림 윤도원, 옥삼헌 등이 문정공 우암 송시열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1704년(숙종 30년) 창건하였으며, 그 후 죽천 김진규, 몽와 김창집, 학공 이중협, 문충공 민진원, 정문공 김수근 등을 추가로 배향되었다.

소설 '토지'의 저자, 소설가 박경리의 생가로 통영시 문학동에 위치해 있다. 생가 인근의 서문고개는 소설 '김약국의 딸들'의 무대이기도 해 표지석이 서 있으며 그 표지석이 있는 골목 안쪽 끝에 있는 건물이 박경리의 생가이다. 생가 주변에는 통영의 옛 정취가 남아 있는 골목길이 이어져 있다. 박경리 생가는 현재 선생과 연고가 없는 일반인이 살고 있어 집 내부를 관람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인근에는 통영의 관광명소 서피랑과 충렬사 등이 있어 함께 둘러볼 수 있다.

밀양 퇴로리 이씨고가는 여주이씨 자유헌(1656~1716)파의 종가집으로 조선 후기 1890년(고종 27)에 자유헌 이만백의 7대손인 항재 이익구(1838~1912)가 퇴로에 들어오면서 건립하여 100여 년 동안 5대에 걸쳐 옛 그대로 잘 보존하고 있는 전통 가옥이다. 이 집은 기와를 얹은 토담으로 구획된 부지에 남향으로 지은 목조 기와집으로 지금 남아있는 건물은 정침과 중사랑, 별채로 구성되어 있다.

월연정은 조선 중종 15년(1520) 월연 이태 선생이 지은 것으로 원래는 월영사가 있던 곳이다. 이태 선생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성리학에 입각해 개혁정치를 추구한 조광필 파가 죽음을 당하는 기묘사화(1519)가 일어나자 벼슬을 버리고 이곳으로 내려왔다. 월연정의 대청인 쌍경당은 임진왜란으로 불탔으나 영조 33년(1757)에 월암 이지복이 다시 지었다. 그리고 고종 3년(1866)에 이종상과 이종증이 정자 근처에 있는 월연대를 보수하고 재헌을 지었다.
미타암은 경상남도 양산시 웅상읍 천성산(千聖山)에 자리 잡은 대한불교조계종 제15교구 본사 통도사의 말사이다. 646년 원효대사가 창건한 것으로 전하며, 원효대사가 창건한 89암자 가운데 하나로 본다. 920년에 지공 대사가 중창하였다. 1376년에 중창했으며, 1888년에 다시 정진(正眞)이 중창하였다. 구한말에 우리나라의 선사상을 부흥시킨 경허(鏡虛)의 제자 혜명(慧明)이 주석했으며, 현재 그의 비석이 남아 있다.
물계서원은 1712년(숙종 38) 지방 유림의 공의로 성송국, 성삼문, 성담수, 성수침, 성운, 성제원, 성혼, 성윤해 등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그 뒤 성여환, 성희, 성수경, 성문준, 성람, 성여신 등을 추가 배향하고, 1814년(순조 14) 성안의, 1857년(철종 8)에 성준득을 추가 배향하였다.

대한불교조계종 쌍계사의 말사인 문수암은 고성군상리면 무선리 무이산에 있는 암자로서 신라 의상조사가 창건했다. 창건 이후 이 암자는 수도 도량으로서 많은 고승들을 배출하였고, 산명이 수려하여 삼국시대부터 해동의 명승지로 유명하였으며 특히 화랑도 전성시대에 국선 화랑들이 이 산에서 심신을 연마하였다고 전해진다.

칠서면 무릉리에 있는 무산사는 조선시대의 유명한 유학자인 주세붕(1495~1544) 선생의 영정과 유품을 모신 곳이다. 선생은 중종 38년(1543)에 백운동 서원을 세워 우리나라 서원의 시초를 이루었으며 이를 기리기 위하여 숙종 24년(1698)에 선생의 후손이 세웠다. 고종(1863~1907) 때 흥선대원군에 의해 철폐되었다가 유림들이 다시 세웠으나 6·25전쟁으로 불탔다. 현재의 무산서당은 그 후에 세운 것이다.

고려 말 충렬왕 7년 원나라 세조가 일본 원정을 준비하기 위하여 정동행성을 두었으나 일본 정벌이 2차에 걸쳐 실패로 돌아간 그해 10월, 환주산(현, 자산동 무학초등학교 뒤쪽 마산시립박물관 일대)에 둔진을 설치하였다. 몽고정은 이곳의 둔진군이 용수를 쓰기 위해 만들었던 우물로 추정되고 있다. [몽고정 맷돌]이라고 불리는 지름 1. 4m가량의 원방형의 돌이 몽고정 근처에서 발견되었는데 이를 차륜이라는 설도 있으나, 맷돌로 쓰였던 것으로 보인다.
목계서원은 조선 숙종 때 사림이 김담(金湛)과 이조(李晁)를 두능서원(杜陵書院)에서 봉 향하다가 서원이 훼철되자 1778년(정조 2)에 유림들이 목계서원을 지어 다시 봉향 하였다. 그 뒤 대원군의 서원훼철령에 의해 철폐된 것을 1883년(고종 20)에 강당을 중수하였으며, 1983년에 완전히 복원되었다. 이 서원을 ‘목계정사(牧溪精舍)’로도 부르는 것은 훼철을 피하기 위해서였던 것 같다. 현재 편액은 목계정사(牧溪精舍)이고 건물 한 채인 재실만 있다.

모은암의 전설은 지리산 하동 화개의 칠불암 전설과 함께 우리나라 불교 역사에 하나의 중요한 문제를 제기하는 곳이다. 김해시 상동면과 생림면의 경계에 위치한 무척산은 수로왕과 가락국 불교 이야기, 기묘한 바위, 산정호수인 천지(天池)가 있어 더욱 신비스러운 산이다. 낙동강을 내려다보는 동면의 기암절벽 아래에 백운암이 있으며 반대쪽인 서면에 모은암이 자리하고 있다.

마산향교는 창원특례시 마산합포구 진동면 교동리에 있으며 1414년(태종 14) 진해현이 설치되면서 진해향교로 창건되었으나 임진왜란 때 방화로 소실되었다. 인조 때 재건하였으나 1920년 일제의 강압으로 철폐되었으나 1990년에 창원군 향교로 복원되었고 현재의 건물도 재건되었다. 입구의 외삼문은 맞배지붕을 올린 솟을삼문이며 학문을 강의하는 명륜당은 정면 5칸 규모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신라 49대 헌강왕 4년(878년) 도선국사가 창건하였으며 선조 36년(1603년) 계형대사가 중건하고 불법을 계승하여 오다가 1946년 청담대사가 수도장의 조건을 구비하고 시설을 개수, 1962년 청곡사 암자에서 해인사 말사로 등록하였다. 1963년 청웅스님이 대웅전을, 1970년 법령스님이 요사체 보수, 1973년 성범 스님이 진입로 1. 5㎞를 포장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함안군 여항면 외암리 음촌마을에서 내곡으로 가는 길옆에 두릉서원(杜陵書院)이 있는데 이는 조선 순조 32년 (1832)에 고향을 생각하는 사림(士林)들이 안민(安慜), 안희(安憙), 안신갑(安信甲) 세분을 봉 향하기 위해 세워진 서원이다. 고종 5년(1868)에 철폐된 후 1930년에 중건(重建)을 거쳐 1984년 복원(復元) 하였다.
창원시 마산회원구 두척동에 위치한 두곡서원은 현종 12년(1864)에 창건하였고 고종 4년(1867에) 옮겨 세웠으며 통일신라시대 학자 최치원 선생을 배향하는 곳이다. 최치원 선생은 9세기 통일신라의 학자로 중국 당나라에서 토황소격문으로 문장가로서 이름을 떨쳤으며 신라로 돌아온 뒤에는 진성여왕에게 시무책을 올려 정치 개혁을 추진하였다. 유교·불교·도교에 모두 이해가 깊었고, 유·불·선 통합 사상을 제시하였으며 수많은 시문을 남겨 한문학의 발달에도 기여하였다.
도천서원은 문익점(1329∼1398) 선생이 태어난 곳으로 나라에서 선생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지은 사당이다. 문익점 선생은 고려 말기의 학자이다 문신으로 우리나라에 목화를 처음 들여온 것으로 유명하다. 서원은 조선 세조 7년(1461)에 세웠으며, 조선 정조 11년(1787)에 ‘도천서원’이라는 현판을 받았다. 고종 8년(1871)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철거되었다가 1975년에 사당인 삼우사를 짓고 서원으로 복원되었다.

고성군의 도연서원은 허기, 허천수, 허재의 뜻을 기리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조선 숙종 13년(1687)에 세웠으나,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고종 5년(1868)에 폐쇄되었다가 1920년에 다시 세웠다. 현재 남아 있는 건물로는 강당, 사당인 추원사, 돈화실, 명성실, 내삼문, 외삼문인 일원문이 있다. 강당은 앞면 5칸, 옆면 3칸의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도성암은 화왕산 기슭에 자리 잡고 있는 사찰로 대한불교조계종 제15교구 본사인 통도사의 말사이다. 신라의 고승 지월선사가 현덕왕 2년(810)에 창건했다고 전해지나 정확한 것은 아니며 그 후의 연혁에 대해서도 알려진 바 없다. 조선시대 임진왜란 당시 전소되어 터만 남아 있다가, 화왕산 자하골의 한 암자가 풍수지리가 나쁜 곳에 자리한 탓에 산 아래 주민들에게 각종 재난이 끊이지 않는다고 하여 이를 막기 위해 재건립되었다 한다.

도봉서원은 임진왜란 때 공을 세운 김명윤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1713년(숙종 39)에 사당을 짓고 1775년(영조 51) 도봉사를 건립하였으며 1844년(헌종 10) 도봉서원으로 승격하였다. 그러나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철폐되었고 1887년(고종 24)에 다시 별묘와 재실을 중건하여 1974년에 서원으로 복원되었다. 별묘에는 선조의 하사품인 장도(쌍검) 등 동산공 김명윤의 유물을 보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