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금곡사(강진)
금곡사는 신라 말 밀봉대사가 창건하여 성문사라 칭하다가 이 주위에 금광이 있다 하여 후에 금곡사라 개칭하였다.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 때 승병들의 훈련 장소로 쓰였으나 왜구의 침략으로 불에 탔다. 이후 폐사와 중창을 반복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사찰 옆 개울가에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동굴이 있는 것을 보면 이곳이 금광이었던 것이 사실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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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곡사는 신라 말 밀봉대사가 창건하여 성문사라 칭하다가 이 주위에 금광이 있다 하여 후에 금곡사라 개칭하였다.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 때 승병들의 훈련 장소로 쓰였으나 왜구의 침략으로 불에 탔다. 이후 폐사와 중창을 반복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사찰 옆 개울가에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동굴이 있는 것을 보면 이곳이 금광이었던 것이 사실인 것 같다.
금강암(金剛庵)은 보령시 미산면 용수리에 있는 높이 411. 8m 양각산(羊角山)의 동편 중턱에 자리 잡은 사찰이다. 1481년(성종 12)에 편찬된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는 사찰 이름이 ‘옥계사(玉溪寺)’로 나와 있으며, 1799년(정조 23)에 간행된 '범우고(梵宇攷)'와 1930년대에 이병연(李秉延)이 찬술한 '조선환여승람(朝鮮寰輿勝覽)'에는 ‘옥계사’라는 이름을 기록한 뒤에 지금은 '금강암'이라 칭한다는 설명이 붙어 있다.
극락암은 간성 대대리 검문소에서 진부령 방향으로 약 2키로 정도가면 우측에 이정표가 있다. 이 이정표에서 마을 안길을 통하여 산모퉁이 숲길을 지나면 어머니 품속을 연상케하는 아담하고 정겨운 사찰이 고즈넉이 노송숲속에 자리하고 있다. 예전 극락암은 건봉사에서 서북쪽으로 2키로 지점에 있었으며, 비구니 스님들의 수행처였다. 945년 묘적동에 창건하였으며 1878년 산불로 인해 건봉사와 함께 소실되었으나 다음 해에 증건하였다.
귀정사는 백제 무녕왕 15년(515년)에 현오국사가 창건한 사찰로, 본래는 만행사(萬行寺)라 불렸다. 이후에 백제의 왕이 절에 참배를 와서 고승(高僧)의 설법에 탄복하여 3일간 절에 머무르며 국정을 살피고 돌아갔다 하여 귀정사(歸政寺)라 고쳐 불렀다. 왕은 “죽고 살기를 스님과 더불어 같이 한다”는 글귀를 남겼다고 한다. 1221년 대방(남원의 옛 이름) 태수 복장한(卜章漢)의 요청으로 귀정사에 제2의 백련결사를 개설했다.
양산 극락암은 통도사의 여러 말사 중 하나이다. 통도사에서 서북쪽으로 1. 5㎞ 떨어진 산속 암자이다. 고려 시대에 창건되어 조선 영조 때 철홍대사가 중창하였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1968년 이후 가람 전체를 경봉선사가 중건, 중수하였다. 풍수지리상으로 입지를 보면 연꽃이 물 위로 올라온 모양인 연화도수형의 지형에 자리 잡고 있다.
김택준가옥은 야산을 뒤로하고 있는 이 집은 마을의 제일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집을 지은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지만 약 200년 정도 되었다고 하며, 현재 경주 김 씨의 후손이 살고 있다. 전체적으로 H자 모양을 하고 있는 전형적인 겹집으로, 안채와 사랑채·부속건물로 되어 있다. 안채와 사랑채는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 자 모양의 화려한 팔작지붕집이고, 부속채는 사람 인(人) 자 모양의 단순한 맞배지붕집이다.

한국의 대표적 서양화가로 우리나라 전통미를 현대화시키는데 주력한 수화 김환기(樹話 金煥基, 1913~1974) 화백이 태어난 곳으로 현재 안채와 화실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김해 김씨 17대 손이 살고 있는 가옥으로 현 소유자의 14대 조부가 세워 지금에 이르고 있으며, 본래 초가였던 것을 60년전 기와로 바꿨다고 한다. 안채와 사랑채로 구분되어 있는데 안채는 양양지방에 남아있는 북방계통의 집이다. 왼쪽으로 넓은 부엌을 배치하고 오른쪽으로 가운데를 갈라 나눈 뒤, 다시 구획하여 6개의 작은 방을 만들었다. 부엌 앞으로 내밀어 지은 외양간은 창고로 개조하였다.
김정묘역 문인석은 고려시대의 문신인 김정 선생의 묘역에 있는 1쌍의 문인석이다. 김정 선생은 고려 공민왕 때 양광도 찰방사와 전라도 찰방사, 대호군을 역임하였으며, 고려 후기 신돈의 개혁정치에 참여했던 인물이다. 공민왕 20년(1371) 신돈이 축출되자 유배되었고 그 후의 행적은 알 수 없다. 다만 신증동국여지승람과 광주목지에 중대광 광성군에 봉하여졌다는 기록이 있을 뿐이다. 이 문인석은 총 2기로 동일한 수법을 사용하여 조각하였고, 재질은 화강암이다.
영의정 김육의 아들이며, 조선 18대 임금인 현종의 장인이자 현종의 아내 명성왕후의 아버지인 충익공 김우명의 묘역이다. 충익공 김우명은 인조 20년(1642) 진사시에 합격하여 강릉 참봉, 세마, 영돈녕부사, 오위도총관 등을 역임하였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김우명이 사망하자 조정에서 부원군의 대접을 하기 위하여 강원특별자치도 춘성군 신동면 증리에 묘소를 하사하였다 한다.
1428년 김복항이 금강정을 세웠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영월제영’에 의하면 이자삼이 군수로 있을 때 금강의 아름다움을 보고 지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정자 안에는 이승만 전 대통령의 친필인 ‘금강정’ 현판이 걸려 있다. 금강정 아래로 푸른 동강이 흐르고 있는 이곳에서 영화 ‘라디오 스타’를 촬영했다. 금강정 주위엔 비운의 왕 단종과 관련된 유적이 자리하고 있다. 정면 4칸, 측면 3칸으로 되어 있다. 익공계 양식으로 바닥은 마루를 깔았다.
평지에 ㄱ자형 안채를 배치하고 一자형 사랑채가 있어 전체 평면은 ㄷ자형을 이루고 있는 집이다. 안채는 대청을 중심으로 오른쪽에 건넌방과 부엌을 두고 왼쪽에는 웃방·안방·부엌·사랑방을 두었는데 사랑방은 원래 부엌의 광을 개조한 것으로 보인다. 웃방과 안방 밖으로 툇마루를 설치하였고 건넌방 앞에서 시작된 ㄱ자형 툇마루는 안방 앞까지 연결되어 있다. 행랑채는 나중에 새로 지은 것인데 대문을 중심으로 왼쪽에는 헛간, 오른쪽은 넓은 방과 부엌을 두고 있다.

나무로 만든 상판에 검은색 타르를 칠해 ‘꺼먹다리’ 라는 이름이 붙었다. 화천수력발전소와 함께 당시의 산업을 엿볼 수 있는 시설물이며 건립 당시의 원형을 잘 간직하고 있어 근대 가구식 구조 교량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한국전 당시 중동부전선을 연결시켜주는 중요한 교량이었기 때문에 전투도 치열했던 곳 이며, 일제강점기 때에는 소양강과 화천을 모노레일을 이용해 수송물자를 이동하기도 했다.

김화군민 망향탑은 강원특별자치도 철원군 근남면 사곡리에 있는 미수복 지구 김화 군민의 실향민 망향탑이다. 1980년 6월 1일에 건립되었다. 김화군은 광복 직전 9만 5,000여 명의 주민들이 살고 광업이 번창하던 지역이다. 6·25전쟁으로 완전히 폐허가 되었고, 전쟁 이후 원래 면적의 3분의 2 가량이 북한과 비무장지대(DMZ)에 속하게 되었으며, 현재는 김화군의 명맥을 유지하지 못하고 철원군 김화읍에 속하여 있다.

1908년 전주선 교부의 데이트(Lews Boyd Tate) 선교사가 지은 한옥교회이다. 조선 예수교 장로회의 사기(事記)에 의하면, 처음의 교회는 1905년에 5칸으로 지었으나,1908년 지금의 자리로 옮겨 지은 것이라고 한다. 현재 금산교회 옆으로 1988년에 새로 지은 교회본당과 사택이 들어서 있다. 건물은 남북방향으로 5칸이며, 여기에서 동쪽으로 2칸을 덧붙여 뒤집힌ㄱ자 형태를 이룬다.
김해 양동리 고분군은 기원전 2세기대로부터 기원 5세기대에 걸쳐 형성된 고분군으로서, 발굴조사 결과 다양한 묘제와 수많은 유물이 출토되어 가야 국가 형성기로부터 발전기의 역사적 사실을 한눈에 보여줄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가곡부락 뒷산에 위치해 있으며, 전체규모는 약 3만 평으로 추정되며 김해에서는 가장 큰 규모이다. 이 고분군은 지하에 무덤이 중복된 상태로 조밀하게 설치되어 매우 복잡한 배치상태를 보여준다.

군위 인각사지는 군위군 화산의 북쪽 기슭 강가 퇴적지대에 자리 잡은 절터이다. 인각사는 선덕여왕 시절 원효가 세운 절이라 한다. 그 뒤 고려 때에 크게 고쳐 지었고, 일연이 충렬왕 10년(1284)부터 5년간 이 절에서 머물며 삼국유사를 지은 장소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인각사는 언제 세워졌는지 문헌으로는 확인할 수 없다. 그러나 발굴조사 때 대웅전터로 생각되는 건물이 있던 곳에서 통일신라시대의 건물터를 확인하여, 신라 후기에 이미 있었던 것으로 짐작하고 있다.

귤림서원은 제사 기능을 가진 충암묘와 교육 기능을 가진 장수당이 복합되어 이루어진 서원이다. 1578년에 제주판관 조인후가 기묘사화로 제주도에 유배되어 사사된 김정의 넋을 위로하기 위하여 그의 적거지에 사묘를 세운 것에서 비롯되었다. 그 후 1660년 제주목사 이괴가 장수당을 건립하였고, 1667년에는 제주판관 최진남이 김정의 사묘를 장수당 남쪽인 현재의 오현단 안에 옮겨 짓고, 이를 사로 하고 장수당을 재로 하여 귤림서원이라 현액하였다.

김해 월봉서당은 1917년에 세운 유학 교육 시설이다. 처음에는 현재 관동중학교가 있는 곳에 세웠으나 1917년에 지금 이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일제강점기 시절에 이곳에서 영남 지역 기호학파의 맥을 이어 학생들을 가르친 월헌 이보림 선생을 기리기 위해 사당인 명휘사를 세웠다. 월봉서당은 앞면 다섯 칸, 옆면 두 칸의 규모로 홑처마를 갖추었고 기둥이 직접 보를 받치는 납도리집이다. 넓은 방과 높은 천장 등이 근대 한옥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김해 산해정은 조선 전기 유학자인 남명 조식이 30세부터 45세까지 처가인 김해에 살며 자신의 학문과 사상을 정립하고 제자를 길렀던 곳이다. 남명 조식의 경에 바탕을 둔 정신 수양과 의를 기반으로 한 실천 정신은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한 곽재우, 정인홍, 김면 등의 제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산해정의 ‘산해’는 ‘높은 산에 올라 바다를 바라본다’라는 뜻으로, 학문을 닦아 경지가 높아지면 생각과 마음이 바다와 같이 넓어진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기양서원은 1701년(숙종 27)에 주세곤, 주선원, 주각, 주재성, 주도복 등 다섯 사람을 추향하기 위하여 함안군 칠원면 무기리에 창건되었다. 기양서원 인근 주재성의 생가에는 무기연당이라는 조선후기 연못이 아직 남아 있다. 주재성은 조선 영조 4년(1728) 이인좌의 난 때 의병을 일으켜 관군과 함께 난을 진압한 인물로 관군들은 돌아가는 길에 그의 덕을 칭송하여 마을 입구에 창의사적비를 세우고 기양서당 앞 넓은 마당에 연못을 만들었다.
기강서원은 임진왜란 때 삼도수군통제사를 지낸 식성군 이운용(1562~1610) 장군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유림과 후손들이 건립한 서원이다. 장군의 묘소는 원래 고향인 경북 청도군 법귀산에 안장되었으나, 인조 8년(1630년) 장자인 이엄(평택 현감)이 의령군 지정면 오천리 산 30-1로 이장하였다.

예천군 용궁면에 있는 기천 서원은 1665년(현종 6)에 고려 인물인 안준을 비롯하여 이문흥, 문근, 문관, 이구 등 5위의 위패를 봉안하기 위하여 기천 정사를 세웠다. 이후 1692년(숙종 18)에는 용궁 월오리로 1차 이건 하였으며, 1703년 (숙종 29)에는 향내 유림의 합의에 따라 서원으로 승격되었다. 1712년(숙종 38) 현 위치인 용궁면 월오리 오룡곡으로 옮겨 재건하였다.

기봉 유복기(1555∼1617) 선생과 회헌 유의손(1398∼1450) 선생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 지내는 곳이다. 원래 후손들의 글공부를 위해 서당으로 세웠던 것인데 후손들이 서원으로 바꾸었다. 지금 있는 건물은 임하댐 건설로 1988년 현재 있는 곳으로 자리를 옮긴 것이다. 유의손 선생은 조선 전기 학자로 여러 벼슬을 거치고 문장에도 뛰어났다고 하며, 유복기 선생은 조선 중기 학자로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도 활약했던 분이다.

금호서원은 동계 이운룡 장군과 향산 백신을 기리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이운룡(1562∼1610)은 선조 18년(1585) 무과에 급제하였으며, 임진왜란 때 많은 공을 세워 경상우수사 겸 3도 수군통제사에 이르렀다. 이 서원은 원래 이운룡의 출생지인 매전면 온막리에 상충사를 세우면서 유래되었다.

경산 금호서원은 문경공 허조의 위패를 모시기 위해 건립한 서원이다. 1922년부터는 허후와 허조를 함께 배향하고 있다. ‘준도문’이라 편액 한 외삼문을 들어서면 정면 하여 강당인 수교당이 자리 잡고 있으며, 마당의 좌측에는 평기와를 얹은 4칸 규모의 맞배기와집인 성경재를 두었다.

금산서원은 1707년(숙종 33년)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허진수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허진수는 퇴계 이황의 문인으로 천품이 온화하고 재기가 뛰어난 영재였으나 벼슬을 단념하고 도산서원에 들어가 학문에 전념하였다. 1574년(선조 7년) 나라에서 그의 학행을 가상히 여겨 통정대부의 품계를 내렸으며, 만년에는 고향에서 정자를 짓고 후진양성에 진력하니 이때부터 그곳을 금곡이라 불렀다.

금곡서원은 1568년(선조 1)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치암[恥菴] 박충좌[朴忠佐] 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봉안하였다. 그 뒤 박눌[朴訥]과 박손경[朴孫慶]을 추가로 배향하였으며,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되었다가 1984년 유림에 의해 회산사[晦山祠] 터에 복원하여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1812년(순조 12) 의성군 안평면 하평리에 조선 개국공신인 김인찬[金仁贊]의 유덕을 추모하기 위해 이곡서원[尼谷書院]으로 창건하였고, 의성군 비안면으로 이건 했다가 대원군 서원철폐령으로 인해 훼철되었다. 그 뒤 1926년에 현 위치에 복설, 근성[芹城]으로 서원명을 고쳤다. 경내의 건물은 사우와 강당, 전사청, 내외삼문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담장을 둘렀다. 서원의 경내는 매우 경사져서 강당과 사당의 고저차가 많이 난다.

1786년(정조 10)에 지방 유림의 공의로 서유(徐愈)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귀산서사(龜山書社)를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1839년(헌종 5)에 ‘구산’이라고 사액 되어 사액서원으로 승격되었으며, 1848년에 서일원(徐一元)을 추가로 배향하였다. 선현 배향과 지방 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오던 중,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되었다. 그 뒤 1983년 지방 유림에 의해 복원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금산원은 1842년에 창건한 언양 김 씨 원사로 감성재라 하고 위열 김취려를 주벽으로 김자수와 김성진을 배향, 삼위를 모셨다. 운영이 어려운 나주의 정열사를 1940년 경 이곳으로 옮겨 정렬사로 개명하고 김천일을 주벽으로 김자수, 김상건 삼위를 배향했다. 그 뒤 1964년 정렬사가 다시 나주로 옮겨지자 김취려를 주벽으로 모시고 김자수, 김천일, 김성진, 김상건 오위를 향사하면서 금산원으로 액호를 바꾸고 건물이 퇴락됨에 따라 1981년 2차례 중수하였다.
군자서원은 1820년에 도내 유림과 후손들의 발의로 삼현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한 양산김씨의 사우이다. 강진에 처음 입향한 분은 강진읍 송현에 거주한 김자정이며, 그의 아들 김명규가 작천으로 이거 하였다. 창건 이후 향사의 예로 제향 되었으며, 1824년 강당을 신축하였으나 1880년 훼철당하였다. 1962년 신실 및 내삼문 강당을 재건하고, 1993 외삼문을 신축하였으며, 2009년에 서원으로 승격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만치당 김수남(1576∼1636)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김수남은 조선 중기 문신으로 임진왜란 때 조정을 따라 강화도로 피난하였으나 그곳에 적군이 침입하자 순절하였다. 이 서원은 숙종 13년(1687) 가야곡면 조정리에 송시열, 송준길이 세웠는데 숙종 16년(1690)에 지금 있는 자리로 옮겼다. 정조 5년(1781)에는 매죽헌 성삼문과 송재 조계명의 위패를 추가로 모셨다.

청주의 기암서원은 조선 후기의 청백리 강백년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한 서원이다. 1699년(숙종 25)에 지방 유림의 공의로 강백년의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오창면 기암리에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으며, 1706년에 오숙을 추가 배향하였다.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철폐되었다가, 1984년 후손들에 의하여 현재의 위치에 복원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금화서원은 보은군 금적산 북쪽 기슭에 있는 서원이다. 1917년 다시 지방 유림들의 주선으로 복건하여 5현을 봉안하여 매년 음력 9월 초 정일에 년 1회 제향을 봉행하고 있으며, 제품(祭品)은 2변(籩) 2두(豆)이고, 건물은 전면 3칸, 측면 2칸 팔작지붕의 사우와 강당 그리고 5칸의 관리사가 있다.

기장향교는 조선 광해군 1617년에 처음 지어졌다. 1855년의 성묘중수기(聖廟重修記)가 남아 있는데, 지금 있는 대부분의 건물은 이때 지어진 것이다. 건물 배치는 교육 공간인 명륜당을 앞에 두고, 제사 공간인 대성전을 뒤로한 전학 후묘의 공간 구성을 이루고 있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대성전, 명륜당, 동재·서재, 풍화루, 내삼문, 외삼문 등이다. 대성전은 앞면 세 칸, 옆면 세 칸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 자 모양인 맞배지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