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산서원
조선 중기 문신인 강항(1567∼1618)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강항은 공조좌랑과 형조좌랑에 있던 중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아 활동하다가 왜적의 포로가 되어 일본으로 압송되었다. 일본에 있으면서 그 나라의 역사, 지리 등을 알아내어 고국으로 보내기도 하면서 일본에는 성리학을 전하였다. 선조 33년(1600) 귀국한 후 벼슬을 사양하고 독서와 후진양성에만 전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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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문신인 강항(1567∼1618)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강항은 공조좌랑과 형조좌랑에 있던 중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아 활동하다가 왜적의 포로가 되어 일본으로 압송되었다. 일본에 있으면서 그 나라의 역사, 지리 등을 알아내어 고국으로 보내기도 하면서 일본에는 성리학을 전하였다. 선조 33년(1600) 귀국한 후 벼슬을 사양하고 독서와 후진양성에만 전념하였다.

아름다운 내장산국립공원의 품 안에 안겨 있는 내장사는 636년(백제 무왕 37) 영은조사(靈隱祖師)가 창건하여 영은사(靈隱寺)라 하였으며, 이때의 가람규모는 50여 동이었다고 한다. 1098년(숙종 3) 행안(幸安)선사가 전각과 당우를 새로 건립하고 중창하였고 1557년(명종 12) 희묵(希默)대사가 영은사의 자리에 법당과 요사채를 건립하고 산 안에 무궁무진한 보물이 숨어있다 하여 절 이름을 내장사라 하였다.

임금이 서울의 궁궐을 떠나 도성 밖으로 행차하는 경우 임시로 거처하는 곳을 행궁이라 한다. 남한산성 행궁은 전쟁이나 내란 등 유사시 후방의 지원군이 도착할 때까지 한양 도성의 궁궐을 대신할 피난처로 사용하기 위하여 조선 인조 4년(1626)에 건립되었다. 실제로 인조 14년(1636) 병자호란이 발생하자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난하여 47일간 항전하였다. 이후에도 숙종, 영조, 정조, 철종, 고종 등이 여주, 이천 등의 능행길에 머물러 이용하였다.
향교는 훌륭한 유학자의 제사를 지내고 지역민을 교육하기 위하여 설립한 고려·조선시대의 국립 지방 교육기관이다. 조선시대에는 국가로부터 토지와 노비 등을 지급받아 교관이 교생을 가르쳤으나, 1894년 갑오개혁으로 근대 교육이 본격화되면서 교육적 기능은 폐지되었다. 남포향교는 조선 태종 13년(1423) 웅천면 대천리에 창건되었으며, 중종 25년(1530) 지금의 위치로 옮겨 지었고, 1975년에 대성전을 중수하였다.
향교는 훌륭한 유학자의 제사를 지내고 지역민을 교육하기 위하여 설립한 고려·조선시대의 국립 지방 교육기관이다. 조선시대에는 국가로부터 토지와 노비 등을 지급받아 교관이 교생을 가르쳤으나, 1894년 갑오개혁으로 근대 교육이 본격화되면서 교육적 기능은 폐지되었다. 남포향교는 조선 태종 13년(1423) 웅천면 대천리에 창건되었으며 중종 25년(1530) 지금의 위치로 옮겨 지었고, 1975년에 대성전을 중수하였다.

전주시 교동 한옥마을과 서학동을 잇는 남천교, 그리고 남천교 위에 세워진 팔작지붕을 한 청연루가 ‘전주 남천교 명품화사업’을 통하여 한옥마을의 새로운 랜드마크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남천교(길이 82. 5m, 폭 25m)는 이 자리에 있던 옛 홍예교의 이미지를 살려 아치형 교량 구조를 하고 있다. 다리 위에 세워진 청연루는 전주 8경 중 하나인 한벽청연인 한벽당과 대칭적 의미로 붙여진 이름이다.

남포관아문은 조선시대 여지도서(輿地圖書)에 의하면 남포읍성의 관아 건물이다. 이전에는 객사(客舍), 동헌(東軒), 아사(衙舍), 향청(鄕廳), 작청(作廳), 현사(縣司) 등 많은 건물이 있었으나, 현재는 진서루와 내삼문, 외동헌이 남아있다. 남포현 관아의 정문으로 사용되었던 관아문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2층 문루 건물로 아래는 출입구, 위는 누마루를 설치하고, 팔작지붕이다.

남포읍성은 고을의 주민을 보호하고 군사적, 행정적인 기능을 함께 하던 곳으로, 차령산맥 서쪽 끝자락의 구릉에 돌로 쌓은 성이다. 원래 고려 우왕 때 서해안을 침범하는 왜구를 막고 서해상 교통을 관할하기 위해 쌓았다. 축성 직후인 1390년(공양왕 2)에 군대가 머물 수 있는 진영을 추가하여 완성하였다. 성벽은 비교적 잘 남아 있는데, 바깥쪽 벽은 돌을 이용하여 직각으로 쌓았고, 성벽의 안쪽은 흙으로 쌓아 올렸다.
남이장군 묘는 화성시 비봉면에서 2. 남이(1441∼1468)는 본관은 의령으로, 태종의 외손이며 좌의정 권람의 사위이다. 1457년(세조 3) 17세 때 무과에 급제하여 세조의 총애를 받았다. 이시애의 난(1467)이 일어나자 출전하여 용맹을 떨쳤고, 여진의 건주위를 정벌할 때에도 선봉으로 적을 무찔러 이름을 날렸고, 26세의 나이에 병조판서에 올랐다.
남원 몽심재는 남원시 수지면 호곡리에 있는 고택으로, 이전에 거주하던 박인기의 7대 조인 죽산 박 씨 박동식(1753~1830)이 세웠다고 한다. 조선 후기 전북 지방 상류 가정의 전형적인 가옥 형태를 잘 보전하고 있다. 산을 등지고 있는 집 앞으로는 낮은 구릉이 자리하고 있다. 여러 채의 건물이 산자락의 급한 경사면을 따라 앞뒤로 자리하고 있어 높이를 달리하고 있다.
읍성이란 군이나 현의 주민을 보호하고, 군사적·행정적인 기능을 함께 하는 성을 말한다. 신라 신문왕(재위 681∼692) 때 지방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남원지역에 소경(지방도시)을 설치하였고, 691년에 쌓은 네모난 형태의 평지 읍성이다. 1597년에는 왜군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성을 크게 다시 쌓고 수리하여 담을 높였다. 그해 8월 조·명연합군과 왜군 사이에 전투가 벌어져 왜군에게 크게 패했고, 이때 싸우다 죽은 군인과 주민들의 무덤이 만인의총이다.
팔당역은 1939년 4월 1일 보통역으로 영업을 개시하였다. 우리나라에서 보기 드물게 플랫폼에 노선을 따라 설치되어 있는 일자형의 장방형 역사로서 희소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건축외형은 비교적 원형을 잘 간직하고 있으며 내부공간은 전면부를 대합실, 후반부를 사무실과 숙직실로 사용하고 있다. 또한, 내부공간은 다소 변형되었으나 주요 구조재는 그대로 유지되고 있어 당시의 철도역사건축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자료이다.

정읍 신태인간 지방도로변에서 더 들어간 곳에 있는 낮은 산인 남산에 남산사가 있다. 남산에는 예부터 반야선터라 하여 알려져 있는 선의 도량으로 병자호란 이전에는 승려가 100여 명이나 기거한 큰절이었다고 한다. 이 절은 옛날에는 한적사(閑寂寺)라 했다. 지금도 절터였던 주추돌과 기와장이 무수히 나오고 있다.

2022년도에 개봉한 영화 에서 베이비박스가 있는 교회 장면을 촬영한 장소로 이야기의 시작점이 되는 곳으로 충분히 인상적인 모습의 장소이다. 극 중 이름은 ‘부산가족교회’였다. 언덕이 많은 부산의 지형을 잘 보여주며 40년이 넘는 역사가 쌓인 외관이 영화의 분위기와 잘 어울린다. 길 아래로 걸어 내려오면 극 중에서 등장한 벽화와 정겨운 동네의 풍경 그리고 같은 영화 촬영 장소인 전포삼거리의 버스정류장과 공중전화 부스가 보인다.
김제시 성덕면 묘라리 소재에 위치한 남산서원은 조선시대에 설립된 지방의 사립 교육기관이다. 병자호란 때 척화파(斥和派)로 활약한 유지화(柳志和)의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1574년(선조 7)에 창건하였다. 그 후 순조 때 남궁제(南宮濟)를 배향했다. 1870년(고종 7) 서원철폐령에 의해 철폐되었다가 1970년에 다시 중건되었다. 경내의 건물로는 3칸 사우인 경의사, 산문인 경의문 등이 있다.
남선창고터는 1900년 함경도에서 배로 물건을 싣고 와서 보관하던 최초의 물류 창고로, 초기에는 북선창고라 불리었으며 경부선을 통해 서울까지 물류를 운반하기 전에 보관하는 곳이었다. 이후 경원선이 생기면서 윗지방에 북선창고가 만들어지자 이름을 남선창고로 변경하였다. 부산 최초의 근대적 물류창고인 남선창고는 1900년 초량객주 정치국이 초량동에 세웠다. 냉동고가 없던 시절에 바닥에 수로를 만들어 물기를 제거하고 서늘하게 유지하는 방법을 사용했다.

남악서원은 신라 김유신 장군이 삼국통일을 완수하기 위해 전략상의 요충지를 찾아다니다가, 이곳 금산 아래서 진을 치고 휴식하던 중 비몽간에 신령이 나타나 삼국통일의 위업을 가르침 받아 높은 공을 세웠다고 전한다. 1922년 지방 유림이 중건하고, 경주 서악서원의 이름을 본떠 남악서원이라고 하였다. 사당에는 김유신 장군과 최치원 선생, 설총 선생의 영정을 봉안하고 있다.

남성재는 고려시대의 문신 영일 정 씨의 시조 형양공 정습명(? ~1151)을 추모하기 위한 재실로 1722년 후손들이 묘소에 묘단을 짓고 제사를 지냈으며, 1742년 현 위치에 묘단과 석상을 신축하였다. 이후 1751년에 묘단 위에 비를 세웠으며, 이듬해 1752년에 비로소 재실을 건립하였다. 창건한 재실이 오래가지 못하고 퇴락하여, 경사가 완만하고 지대가 높은 곳에 1784년에 재건하기 시작하여 1785년에 19칸 규모로 완성하였다.

1998년 조성된 남산골한옥마을은 남산 북측 옛 수도방위사령부 부지 총 79,934m²(24,180평)에 한옥 5동, 전통공예관, 천우각, 전통정원, 서울남산국악당, 새천년타임캡슐 광장으로 구성되어 시민과 관광객을 맞이하고 있다. 번화한 도심 한가운데에서 한국 전통문화를 소재로 한 다양한 체험거리를 만나볼 수 있으며, 남산 자락을 따라 전통조경 양식으로 조성된 계곡과 정자, 각종 화초가 만들어내는 아름다운 풍경을 만날 수 있다.

만인의총은 정유재란(1597) 때 남원성 전투에서 순절한 민. 관. 군 1만여 의사의 호국의 얼이 서려 있는 곳이다. 임진왜란(1592) 때 호남을 침범하지 못해 승리하지 못했다고 판단한 왜군은 1597년 11만 대군으로 다시 침략하여 적의 우근은 전주성을, 좌군과 수군 5만 6천은 남원성을 공략하였다. 조정에서는 남원성을 사수하기 위해 전라병사 이복남이 이끄는 1천여 군사와 명나라 부총병 양원의 3천 병사로 하여금 남원성을 지키게 하였다.
광릉은 조선 7대 세조(재위 1455~1468)와 정희왕후 윤씨(1418~1483)의 능이다. 같은 능역에 하나의 정자각을 두고 서로 다른 언덕에 능침을 조성한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의 형식으로 조선왕릉 중 최초로 조성된 형식이다. 정자각 앞에서 바라보았을 때 왼쪽 언덕(서쪽)이 세조, 오른쪽 언덕(동쪽)이 정희왕후의 능이다. 1468년(예종 즉위)에 세조가 세상을 떠나자 현재의 자리에 조성되었다.

동해시 삼화동에 위치한 ‘금란정’은 무릉계곡 매표소 출발점을 지나자마자 우측에서 보이는 정자이다. 둥근 화강석 초석 위에 목조 원기둥을 세운 정면 3칸, 측면 2칸의 아담한 규모로, 겹처마 팔작 기와지붕양식의 건축물이다. 주변 산새와 함께 무릉계곡에서 흐르는 소리와 함께 정자에 여유 있게 앉아서 휴식을 취하다 보면 도심에서 벗어난 자연의 정취를 흠뻑 느낄 수 있다.
당산은 신이 있다고 믿는 민간신앙의 대상물이다. 남문 안 당산은 조선시대 읍성의 남문터로 알려진 취원문루, 일명 건선루 자리에 있었던 것으로, 1992년 현재의 자리로 옮겨 세운 것이다. 성을 지키는 수호신적인 기능을 하였던 것으로 보이는 이 당산은 2개의 화강암을 다듬어 하나의 기둥처럼 아래위로 세웠는데, 위로 올라갈수록 좁아지고 있다.

제주 금룡사는 1930년 김연화 보살님에 의해 설립된 염불당이 그 창사의 시초가 되었다. 청춘고혼(靑春孤魂)이 된 동생 덕암(德庵)의 넋을 기리며 오십 년 남짓 지낸 세월에 염불당 및 요사체가 폐허 지경까지 왔을 때, 자재 현도(自在賢途) 스님을 만나 인연이 되어 1975년 대웅전 건립을 기점으로 사찰로 면모를 일신했다. 대웅전에는 석가모니를 주불로 모시고 관음대세지보살이 좌우에 협시하고 있다.

금산 대원정사는 금산 시내 중심가와 가까운 도심 속 사찰이다. 원래 하신리 온양 이씨 어필각 인근에 있었으나, 일제강점기 때 처음 위치에서 약 100m 정도 떨어진 곳으로 옮겨졌다가 1982년 현재의 위치로 옮겨졌다. 이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규모로 내부에 우물마루를 깔고 중앙의 뒤에 불단을 조성한 후, 신안사에서 옮겨온 것으로 전해지는 비로사나불을 봉안하고 있다.

남미질부성은 포항시 흥애읍 남성리, 중성리, 망천리 일대에 있는 신라시대 성곽이다. 흥애읍 남쪽 평지에 돌출된 구릉지를 이용하여 축조한 토성이다. 흙으로 쌓은 성벽의 둘레는 약 2km이다. 성 안에는 남성리 못산마을이 있고, 이 마을 서쪽 구릉지에는 성주의 무덤인 듯한 고분이 9기 정도 있다. 못과 우물도 한 개씩 남아있다. 삼국사기에 504년 9월에 주민들을 동원하여 파리성, 미실성, 진덕성 등 12개의 성을 쌓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경주 낭산의 정상에 있는 신라 제27대 선덕여왕릉(재위 632∼647)은 646년경에 조성되었다. 높이 6. 8m, 지름 23. 6m의 원형 봉토분이며, 자연석을 이용해 봉분 아래에 2단 보호석을 쌓은 것 외에는 별다른 장식이 없다. 선덕여왕은 아들이 없던 진평왕의 딸로 태어나 성골이라는 특수한 신라 왕족 의식에 의해 신라 최초의 여왕이 되었다.

무선동 마을은 해남읍에서 5㎞ 정도 떨어진 두륜산 끝자락에 위치하고 있는 마을이다. 약 30년 전 관광객을 유치하기 위해 한옥으로 조성된 민박 마을로 초창기에 성황리에 운영되다 잠깐 주춤하였지만, 90년대 후반부터 가족 중심의 관광이 시작되고, 시설을 보완함으로써 도시민들로부터 각광을 받고 있는 한옥민박 마을이다. 마을 내에 있는 두륜사라는 작은 암자가 있다. 마을에 들어서면 제일 우측에 보이는 건물이다.
고려 보문각 대제학과 판도판서의 관직에 오른 영천이씨 영양군 6세 남곡공 휘 석지와 그의 자제인 집현전 제학과 한성부윤이셨던 장자 휘 안우, 직제학 겸 병조판서이신 차자 휘 아직, 이조 정랑이 신 삼자 휘 안유, 군기사부정 휘 현실, 휘 안실 등 6위를 배향하고 있으며, 매년 음력 3월 첫 일요일 영천이 씨 남곡공파 후손들이 참 석하여 제사를 올린다.
일재 이항·건재 김천일을 비롯하여 김점·김복억·김승적·소산복을 기리고 있는 서원이다. 이항(1499∼1576)은 조선 중기 문신으로 성리학에 조예가 깊은 학자이다. 김천일(1537∼1593)은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왜군을 무찌른 장수이다. 이 서원은 선조 10년(1577)에 이항과 김천일을 추모하기 위해 세웠고 숙종 11년(1685) 임금으로부터 ‘남고’라는 이름을 받아 사액서원으로 승격되었다.

남고사는 고덕산에 있는 사찰로, 대한불교조계종 제17교구 본사인 금산사의 말사이다. 남고산성을 따라 전주의 남쪽을 지키고 있는 사찰로, 절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면 전주 시가지가 한눈에 보여 아름다운 전망을 만나볼 수 있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대웅전, 관음전, 삼성각, 사천왕문 등이 있다. 남고사 안쪽에는 삼성각이 자리를 잡고 있는데, 삼성각은 한국 고유의 토속신앙과 불교가 합쳐져 생긴 형태로, 산신, 칠성, 독성을 봉안하는 불교의 건축물이다.
군위군 군위읍 대북리에 있는 남계서원은 조선 중기의 문신 류성룡(1542~1607년)과 이호민(1553~1634년)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기 위해 1581년(선조 14) 3월에 창건되었다. 류성룡이 1583년(선조 16) 경상도 관찰사로 있을 때 남계서당을 건립하였는데, 1607년 세상을 떠난 뒤 1621년(광해군 13) 후학들이 중수하고 서애의 위패를 모셨으며, 남계서원으로 승격시켰다. 이후 1787년(정조 11)에 이호민을 추가 배향하였다.
![남계서원 [유네스코 세계유산]](https://tong.visitkorea.or.kr/cms/resource/32/3538332_image2_1.jpg)
함양 남계서원은 1552년(명종 7년) 개암(介庵) 강익(姜翼)에 의해 남을 내 몸같이 사랑하는 도심(道心) 회복(유학 교육)과 일두(一蠹) 정여창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창건되었다. 1566년(명종 21년)에 ‘남계(蘫溪)’라는 이름으로 사액되었다. 정유재란(1597년)으로 불타 없어진 것을 1603년(선조 36년)에 나촌으로 옮겼다가, 1612년(광해군 4년) 옛 터인 지금의 위치에 다시 지었다.

국악의 거리에서 외길을 따라 고당리 방면으로 가다 보면 난계 박연 선생이 태어난 가옥이 있다. 난계 박연은 고구려의 왕산악, 신라의 우륵과 함께 우리나라 3대 악성으로 손꼽힌다. 조선 초기의 문신이자 음악가로 충북 영동에서 태어나 타계했다. 박연은 악보와 악기를 정리한 악서를 편찬하고 대고와 석경 등 아악기를 제작했다. 또, 궁중악을 완성하고 악기를 조율하는 편경을 만드는 등 국악을 발전시키고 완성한 국악의 아버지다.
고려시대 함안 출신의 장군인 충열공 이방실(1298~1362) 장군을 배향하기 위해 건립한 서원이다. 이방실 장군의 뜻을 기리기 위해 1842년(헌종 8) 후손들이 남강사를 건립하여 매년 제를 지냈으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어 이를 안타깝게 여기던 후손들이 1944년 옛터에 복원하였다. 그 후 1998년 정부 보조금으로 충렬사와 남강서원을 중건하여 현재까지 장군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남강서원은 죽재 이겸수공을 추모하는 서원으로, 관민의 염원으로 1783년(정조 7년)에 남강사라는 이름으로 세워졌고, 1868년(고종 5년)에 사림의 공의에 따라 남강서원으로 승호 되어 후학양성이 활발하고, 사림유생들의 강학논경이 빈번하였던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