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당진면천읍성
면천읍성은 당진시 면천읍 소재지에 남아있는 평지 읍성으로 당진, 서산, 태안 등과 더불어 옛부터 중국으로 통하는 바닷길이 있었던 곳이다. 이처럼 중국과의 통상에 중요한 통로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국방상의 중요한 거점이기도 해서 백제시대부터 중요한 거점으로 취급되었다. 지금의 읍성이 세워진 것은 1439년(세종 21년)으로 조선 후기까지 면천의 군사 및 행정중심지의 기능을 수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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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천읍성은 당진시 면천읍 소재지에 남아있는 평지 읍성으로 당진, 서산, 태안 등과 더불어 옛부터 중국으로 통하는 바닷길이 있었던 곳이다. 이처럼 중국과의 통상에 중요한 통로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국방상의 중요한 거점이기도 해서 백제시대부터 중요한 거점으로 취급되었다. 지금의 읍성이 세워진 것은 1439년(세종 21년)으로 조선 후기까지 면천의 군사 및 행정중심지의 기능을 수행하였다.

한강, 그리고 강 건너 남산을 바라보는 서달산 중턱에 작은 사찰이 있다. 낮이면 흐르는 강물을 멀리서 지켜볼 수 있고, 밤이면 작은 불빛을 발하는 남산의 정경을 바라볼 수 있는 열린 사찰이다. 서달산을 남산으로 자연과 함께하는 맑은 도량으로 알려져 있는 곳으로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도심 속에서 찌든 혼탁한 마음을 바로 세울 수 있는 도심 속 전통사찰이다.

충주 단호사는 한국불교 태고종의 말사로 조선 후기 숙종 때 중건한 사찰이다. 중건 당시 ‘약사’라 하였고, 1954년 단호사로 개칭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3칸의 맞배집인 대웅전과 약사전, 용왕전, 요사채 등이 있다. 약사전 내에는 1976년 보물로 지정된 철불여래좌상이 봉안되어 있다. 11세기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불상으로 고려 시대 철불의 귀중한 유품이며, 지역적인 유파성을 연구하는 데 도움이 된다.

사직은 토지를 관장하는 사신과 곡식을 주관하는 직신을 가리키며, 두 신을 제사 지내는 단을 만들어 모신 곳이 사직단이다. 토지를 주관하는 사신과 오곡을 주관하는 직신에게 고을의 백성이 편안하게 살 수 있도록 풍요를 기원하는 제사를 지내는 제단으로, 매년 중춘과 중추에 사직제를 지내고 나라의 큰일이나 가뭄이 있을 때에는 기우제를 지내기도 하였다.

달성 하목정은 임진왜란 때 의병장이었던 낙포(洛浦) 이종문(李宗文)이 1604년(선조 37)에 세운 것이다. ‘하목정’이라는 정호(亭號)는 인조가 왕위에 오르기 전에 이곳에 머문 적이 있어 그 인연으로 이종문의 장남인 이지영에게 직접 써 준 것이다. 이곳은 조선 중기에 건립된 평면형태가 독특한 정자형 별당 건축으로 공간구성과 세부기법 및 의장 등에는 많은 특색이 나타나고 있어 역사적, 건축적, 학술적 가치가 뛰어난 곳이다.

현풍석빙고는 얼음을 저장하기 위해 돌을 쌓아 만든 창고이다. 남북으로 길게 축조되어 있으며, 출입구가 개울을 등진 능선 쪽에 마련된 남향구조이다. 돌의 재질은 모두 화강암으로 외부에서 보면 고분처럼 보인다. 입구는 길쭉한 돌을 다듬어 사각의 문틀을 만든 후 외부공기를 막기 위해 돌로 뒷벽을 채웠다. 외부는 돌을 쌓고 점토로 다져서 흙을 쌓아 올렸다.

성가정 성지는 1866년 병인박해 때 남한산성에서 순교하신 정은 바오로의 시신이 안장된 곳이다. 성지 개발 위원회에서는 순교자 정은과 그 가족들의 순교 정신을 현양하고 기리기 위해 이곳을 개발하고, 1987년 9월 15일에 수원교구장 김남수 안젤로 주교님의 집전으로 축성하였다. 오솔길을 따라 들어오면 오래된 수도원 같은 느낌의 성지가 나타난다. 앞으로는 수량이 풍부한 시냇물이 흐르고 뒤로는 울창한 숲의 와룡산이 감싸고 있다.
충청북도 단양군 단양읍 도담리(嶋潭里) 남한강가에 있는 석기시대 및 청동기시대 동굴유적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구석기 문화 유적으로 전기구석기부터 청동기시대에 이르는 거의 모든 시기의 유물층이 발견되어 각 문화층의 성격을 찾아볼 수 있다. 1980년 충주댐 건설로 인한 수몰지역에 실시된 문화유적 지표조사에서 구석기시대의 동굴유적임이 확인되었다.

단구서원은 문희공 이세기 선생을 주벽으로 하고, 문효공 이천 선생, 송와공 이종윤을 배향하는 서원이다. 원래 송와공을 제향 하는 모현서당이 철종 13년(1862)에 건립되었는데, 고종 5년(1868)에 훼철되어 1983년에 단구서원을 창건하였다. 이세기는 고려 충렬왕 때 명신으로 문장에 능하였으며, 밀직부사, 예문관대제학, 동지춘추관사, 검교정승 등을 역임하였다.
단양향교는 1415년 창건된 후 퇴계 이황 선생이 현 위치인 단양 단성면 상방리로 이건한 향교이다. 향교는 훌륭한 유학자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며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해 설립된 고려, 조선시대의 국립 교육기관으로 갑오개혁 이후 교육적 기능은 사라졌다. 영조 때 두 차례 낡은 부분을 손질하였으며, 정조 때 군수 조경진이 명륜당을 고쳐지었다. 1971년과 1977에도 각각 낡은 부분을 손질하여 고쳤다.
단양 조덕수 고택은 남한강이 굽이쳐 흐르는 가곡면의 상덕천 마을, 해발 200m의 얕은 산자락(국수봉)에 있는 목조기와집으로, 조자형 가옥으로도 불린다. 조자형의 6 대조인 조덕수가 1770년경에 지었다고 전해온다. 이 지역의 중농의 생활상을 잘 보여주는 민가이다. ‘ㄱ’ 자형의 안채와 ‘ㄴ’ 자형의 행랑채가 맞물려 ‘ㅁ’ 자 모양을 이루는 전형적인 중부 내륙 지방의 민가 형식의 가옥이다.
단양적성은 충청북도 단양군 단성면 하방리 성재산 정상에 있는 돌로 쌓아 만든 산성이다. 단양적성은 석축성으로 성의 길이가 923m이지만 대부분 붕괴되었고 북동쪽 내외 부분의 안쪽 벽 높이 2~3m, 폭 1m의 석축이 일부만 남아 있다. 성재산 봉우리와 남쪽 비탈을 빙 둘러쌓은 테뫼식 산성이며 성문 자리는 남서쪽, 동쪽, 남동쪽 등 세 곳에서 발견되었다.
신라말의 학자이며 문장가인 최치원(857∼?)이 지은 정자로, 은거 생활을 하던 당시에 글을 읽거나 바둑을 두며 휴식처로 삼았던 곳이다. 최치원은 신라의 유교학자들 중에서 대표적인 인물이다. 당나라로 유학을 가서 과거에 급제한 후, 중국에서 황소의 난이 일어나자 「토황소격문」이라는 글을 써서 이름을 날렸다. 귀국 후 정치개혁을 위해 노력을 기울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관직을 떠나 가야산에 은거하면서 여생을 보냈다.

논산 연산역 급수탑은 1911년 호남선의 개통과 함께 증기기관차의 물을 공급하기 위해 같은 해 12월 30일에 설치되어 1970년대까지 약 60여 년간 사용되었다. 현재 남아있는 급수탑 가운데 연대가 가장 오래되었다. 열차의 발전과 함께 기능을 상실한 채 남아있던 이 급수탑은 근대 산업시설물로의 역사성과 희소한 조형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전체 높이는 16. 2m, 지면부의 바깥지름은 5. 28m이며, 최상단부 철제 물탱크의 바깥지름이 4.

정읍시 태인면 소재지에서 있는 항가산을 올라가면 중턱에 다천사가 있다. 500년이 넘는 느티나무가 있는 다천사는 옛날 절이 있던 자리라고 하는데 벽산스님이 1930년경 이 절을 창건했다. 항가산은 불교적 향기가 가득한 곳으로 항가산이라는 이름은 항하사의 항 자에다, 석가모니의 가 자를 합쳐 만들어진 산이다. 그 뜻은 수 많은 모래와 같이 부처님이 많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한편 다천사라는 이름은 차를 끓여도 좋을 만큼 맑은 물이 있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노태우 대통령 생가는 대구 동구 신용동 팔공산 기슭에 자리 잡고 있다. 신용동이란 명칭은 신령스러운 용이 하늘로 올라간 용지가 있다고 하여 이름 붙여졌다. 신용동에 위치한 용진마을에 가면 노태우 대통령 생가가 있다. ‘용의 머리’에 자리한 명당이라 하며, 안채와 사랑채, 외양간 등이 소박한 모습으로 남아 있어 살아있는 역사 교육 현장으로 이용되고 있다. 용진마을은 교하 노 씨의 집성촌이기도 하다. 마을 주변은 봄철이면 복사꽃이 만발해 장관을 연출한다.

농암종택은 농암선생이 태어나고 자란 집이며, 직계자손들이 대를 이어 살아오고 있다. 최초 이 집을 지은 사람은 영천 이씨 이헌으로, 농암 이현보 선생의 고조부이다. 종택은 2,000여 평의 대지 위에 사당, 안채, 사랑채, 별채, 문간채로 구성된 본채와 긍구당, 명농당 등의 별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긍구당은 1370년 전후 이헌이 지은 건물이며, 명농당은 1501년 이현보 선생 나이 44세 때 귀거래의 의지를 표방하고 지은 집이다.

다솔사는 신라 지증왕 때 범승 연기조사가 창건한 역사 깊은 고찰로,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는데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후인 숙종 12년(1686)에 승려들이 힘을 모아 10년 세월에 걸쳐 중창불사로 크게 중흥했다. 그러나 62년이 지난 후인 영조 24년(1748)에 큰 불로 말미암아 불행히도 큰 재앙을 겪었으며 같은 왕 34년(1758)에 여러 스님이 또 합심하여 명부전과 대양루 그리고 사왕문을 중건했다.

대구광역시 달성군 가창면 우록리 삼정산 기슭에 자리한 녹동서원은 모하당 김충선 장군을 배향하는 서원이다. 장군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향도 유림들이 상소하여 정조 15년인 1791년에 건립하였다. 서원경내는 향양문을 비롯한 녹동서원, 녹동사. 충절관을 비롯해 깁공의 묘소도 서원 뒤편에 자리하고 있다.

노산사지는 주자, 송시열, 화서 이항로 세 분의 영정과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이항로 선생이 생전에 주자와 송시열의 영정을 그려 모시고, 항상 경모 하던 뜻을 받들어 주자를 주벽으로 하고 송시열과 화서를 동서로 모셨다. 원래 330m² (100여 평)에 이르던 사당이 6. 25 전쟁 때 불타 없어졌다. 그 후, 사림들이 화서 선생을 추모하고 그 도학 정신을 계승하고자 1950년 현 위치에 사당을 짓고 매년 9월 15일 제사를 지내고 있다.

노봉서원은 조선 단종(재위 1452∼1468) 때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을 지키다 순절한 죽림 권산해(∼1456)의 절의를 본받고 후진을 양성하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권산해는 조선 전기의 의인이다. 세조 원년(1455) 수양대군이 단종의 왕위를 빼앗자 두 임금 섬기기를 거부하며 낙향했다. 그 뒤 사육신과 더불어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순절했다.

노성궐리사는 공자의 영정을 봉안한 영당이다. 궐리사라는 이름은 공자가 태어나고 자란 마을인 궐리촌에서 유래한 것이다. 숙종 13년(1687) 우암 송시열이 궐리사를 세우려고 했으나 2년 뒤 세상을 떠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 뒤 숙종 42년(1716) 권상하, 김만준, 이건명 등의 제자가 현 위치에서 서쪽방향으로 있는 노성산 아래에 궐리사를 세우고 다음 해에 공자의 영정을 봉안하였다.
노은영당은 진천군 이월면 노곡 마을의 왜가리 번식지 부근에 있는 사당으로, 조선 선조 때의 문신인 신잡의 영정을 모신 곳이다. 독송 신잡(1541∼1609) 선생은 임진왜란 때 탄금대에서 전사한 신립 장군의 형이다. 과거에 급제한 후 이조참판과 형조참판을 지냈으며 임진왜란 때 선조를 의주까지 호종한 공으로 호성공신 2등에 평천 부원군으로 봉해졌으며 개성유수가 되었다.

노동서원(魯東書院)은 우리나라 사학의 원조인 최충(崔冲)의 영정과 위패, 그리고 그의 아들인 최유선(崔惟善)을 봉안하고 있다. 최충의 12대 손인 최변이 이곳에 낙향하여 자손들이 번창하자 선생의 영정을 모신 영당을 지었다가 후에 노동서원이라 개칭되었다. 노동서원은 유교적 전통문화 계승과 발전을 위한 행사의 장으로도 쓰이며 특히 인근 초·중·고 학생들의 유적순례지로서 좋은 장소가 되고 있다.

노강서원은 1689년(숙종 15)에 인현왕후의 폐위가 부당하다고 간언 하다 죽음을 당한 정재 박태보(朴泰輔, 1654~1689)의 뜻을 기리고 지방 교육의 장으로 삼기 위하여 1695년(숙종 21)에 서울 노량진에 건립하였다. 조윤벽 등의 간청으로 1697년(숙종 23)에 숙종이 ‘노강’이라고 이름을 지어 새긴 현판을 내렸다. 이후 1754년(영조 30)에 다시 지었으며, 대원군의 서원 철폐 조치 이후에 남은 47개 서원 중 하나이다.

노계서원은 조선 후기 풍기 지역 사림들이 진중길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한 노계사에서 유래한다. 노계서원 경내에는 상현사·강당·행정·전사청 등이 남아 있다. 사당인 상현사는 진중길과 한산두의 위패를 모셔둔 곳이다.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강학 공간인 강당은 정면 3칸, 측면 반칸 규모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평면은 중앙에 마루를 깔고, 좌우에 온돌방을 둔 중당협실형으로 구성되어 있다.

충청북도 영동군에 위치한 노근리 평화공원은 1950년 한국전쟁 당시 발생했던 노근리 양민 학살사건으로 희생된 영령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조성된 공원이다. 공원 내에는 방문자센터, 평화기념관, 위령탑, 조각공원, 사건현장, 전망대, 평화기원마, 야외전시장, 교육관 등의 시설이 있다. 평화기념관은 공원의 주제성을 부각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곳으로, 상설전시실 및 영상실 등을 포함하며 위령탑과 연계하여 노근리 평화공원의 랜드마크적 기능을 담당하고 있다.

전라북도 임실군 삼계면 후천마을에 있는 노동환 가옥은 조선시대의 향반 가옥 중 하나이다. 마을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이 집은 제비가 알을 품는 형상의 명당 지에 위치하나 집을 바라보고 있는 앞산이 뱀의 머리혈인 사두혈이기에 이 집안에 부자나 인재가 나오지 않는다고 하여 사두의 기운을 누르고자 산머리에 강정이라는 정자를 세웠다는 전설이 있다.
너리굴 문화마을은 비봉산 자락에 자리 잡고 있는 캠핑장과 펜션 및 다양한 문화공간까지 갖춘 산속의 마을이다. 너리굴아란 말은 넓은 골이라는 뜻의 안성 고유어이다. 너리굴 문화마을은 자연과 예술이 한데 어울려 있는 마을로, 강당 및 회의실과 펜션 숙소, 카라반, 운동장, 수영장, 카페, 아트숍 등이 갖추어져 있다.

남희정은 부사 황종림이 지은 정자로 북은 관어대, 남은 남희정이라 하였다. 두 정자를 지은 목적은 양로와 교육이었으며, 두 정자를 이 지역 노인들에게 사용하게 하여 노인들을 돌보고 젊은이들을 교육하기 위하여 강학과 향약의 시행처로 사용하였다. 이처럼 향약의 시행처로 정자가 사용됨은 매우 중요한 사례라 할 수 있다. 정자의 구조를 살펴보면 사방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구성되어 있으며, 정자의 내부에는 기, 명공기, 계헌 등이 걸려 있다.

내원암은 울산 12경 가운데 하나인 대운산 기슭에 자리 잡고 있는 신라시대의 고찰 가운데 하나이다. 석남사, 문수사, 신흥사와 함께 울산 지역의 4대 고찰 가운데 하나로, 신라시대 고봉 선사가 창건하였다는 대원사의 암자로 현재 대원사는 내원암 입구에 터로 남아있다. 주변은 울산 12경 가운데 하나로 계곡물이 맑고 깨끗하기로 유명하여 울산과 주변 지역 시민들이 즐겨 찾고 있는 곳이다.
내원사는 대전 서구 도솔산 동쪽 사면에 자리한 사찰이다. 도솔산은 대전 시내에 솟아 있는 비교적 낮은 산으로, 많은 시민들이 가벼운 산책이나 등산을 위해 자주 찾는 장소이다. 내원사는 이처럼 도심과 가까우면서도 산속에 위치해 있어, 시민들과 관광객들이 편리하게 접근할 수 있는 휴식처로 사랑받고 있다. ‘내원사’라는 이름의 사찰은 전국 여러 곳에 있으나, 도솔산 내원사는 험준한 산사에서 느끼기 어려운 포근하고 안정된 분위기를 자아낸다.
남해향교는 1450년 하신(河紳)이 남해현령으로 재임할 때 봉강산 포교당터에 건립하여 개교하였다. 임진왜란 때 화재로 소실된 후 1669년(현종 10)에 사당인 대성전을 고쳐 세웠다. 그 후 고종 29년(1892)에 대성전을 비롯한 동·서 양무와 내삼문을 지금의 위치로 옮겼고, 점차 그 밖의 건물들도 모두 옮겨 세웠다.

남면 상가리 남쪽에 위치한 임진성은 이름 그대로 임진왜란 때 왜구의 침입으로부터 수호하기 위해 지어진 성이다. 임진왜란 때 왜적을 막기 위해 민, 관, 군이 힘을 합쳐 쌓았다는 이유로 민보성이라 부르기도 한다. 임진성은 내성과 외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내성은 길게 늘어선 돌덩이들이 차곡차곡 높게 쌓아져 있으며, 토성으로 된 외성은 흔적만이 남아있다.

남해대교에서 섬의 한가운데를 향해 들어오면 관음포 이충무공전몰유허가 자리 잡고 있다. 일명 ‘이락사’라고도 불리는 이곳은 노량해전을 승리로 이끌고 전사한 이순신장군의 유해가 맨 처음 육지에 오른 곳이다. 이락사 앞 뜰에는 충무공 순국 4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유언비가 역사를 증명하듯 하늘을 향해 솟아있다. 이락사가 순국 성지로서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한 것은 장군이 전사한 지 234년이 지난 1832년이었다.

벚꽃터널 길을 지나 노량마을로 들어오면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관음포에서 전사한 후 시신을 잠시 모셨던 충렬사가 있다. 충렬사의 가장 큰 특징은 이순신 장군의 가묘가 남아 있다는 점이다. 1598년 11월 19일 돌아가신 충무공의 유해는 충렬사 자리에 안치되어 있다가, 1599년 2월 11일 전라 땅 고금도를 거쳐 외가 동네인 아산 현충사 자리에 운구되어 안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