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주 양진당
조선시대 문신 검간 조정이 1626년 지은 가옥인 상주 양진당은 종도리(용마루 밑 서까래를 거는 도리)기록에 의하면 1807년(순조 7)에 중수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으며 1966년 대홍수 때 사랑채가 훼손되고 안채 23칸만 남았으나 1981년 전면 해체, 복원하였다. 원래 정면 9칸, 측면 7칸의 규모의 ‘ㅁ’자형 맞배지붕 건물인데 지금은 퇴락하여 좌우가 약간 다른 ‘ㄷ’ 자형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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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문신 검간 조정이 1626년 지은 가옥인 상주 양진당은 종도리(용마루 밑 서까래를 거는 도리)기록에 의하면 1807년(순조 7)에 중수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으며 1966년 대홍수 때 사랑채가 훼손되고 안채 23칸만 남았으나 1981년 전면 해체, 복원하였다. 원래 정면 9칸, 측면 7칸의 규모의 ‘ㅁ’자형 맞배지붕 건물인데 지금은 퇴락하여 좌우가 약간 다른 ‘ㄷ’ 자형으로 남아 있다.

추원당은 1759년(영조 35)에 목조와가로 최초 건립되었으며, 배치는 묘우, 강당, 내외삼문, 전사청, 고직사 등 전형적인 재사형태로 구성되어 있다. 이곳은 조선 선조, 인조 때의 학자인 정구, 김성일의 제자였던 검간 조정 선생의 불천위를 모신 재사이다. 조정 선생은 임란 시 창의하여 의병 활동을 주도하였고, 특히 당시의 상황을 기록한 ‘임진란 기록’은 보물로 지정 관리되고 있으며 임란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보존되고 있다.

경상북도 상주시 사벌면 금흔리에 있는 이 성은 흙으로 쌓은 산성으로, 내부에 넓은 계곡을 포용하고 계곡을 둘러싼 주위의 능선을 따라 성벽을 쌓은 포곡식 산성 형태를 띄고 있다. 사벌면의 들판을 U자형으로 둘러싸고 있는 능선 가운데 있으며, 성의 안과 밖에서는 청동기 말기, 초기철기시대의 유물과 원삼국시대의 유물이 발견되고 있다.
성수산에 위치한 상이암은 신라 헌강왕 원년(875)에 도선국사가 창건하였다고 하며, 최초 도선암이라 하였다고 한다. 그후 태조 3년(1394) 각여선사(覺如禪師)가 증수하였으나 1894년 동학혁명 때 병화를 입었다가 다시 1909년 김대건(金大建)이 중건했다. 일본 강점기에는 의병장 이석용이 상이암을 근거로 항일 운동을 전개하였는데 그 여파로 절은 일본군대에 의해 불에 타버렸다. 1912년 대원(大圓) 스님이 재건하였으나 1950년 한국전쟁당시 소실되었다.

함양군 백전면에 위치한 상연대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2교구인 해인사의 말사이다. 신라 말 경애왕 1년(924) 고운 최치원 선생이 어머니의 기도처로 건립하여 관음 기도를 하던 중 관세음보살이 나타나 상연(上蓮)이라는 이름을 하여 상연대로 부르게 되었다고 전한다. 창건한 이래 신라말에는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하나인 실상선문(實相禪門)을 이곳에 옮겨와 선문(禪門)의 마지막 보루가 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상원사는 치악산 남대봉(1,182m) 기슭에 위치한 사찰로, 100평 남짓한 돌바닥 위에 세워져 있다. 절 앞 바위틈에서는 샘물이 솟고, 그 앞 40여 m 벼랑 끝에는 희귀한 계수나무 세 그루가 서 있다. 치악산의 이름 유래가 된 은혜 갚은 꿩 전설이 이 절에서 비롯되었다. 상원사는 신라시대 창건된 것으로 추정되며, 현재는 대웅전·심우당·심검당·범종각·산신각 등이 문화유산자료로 지정되어 있다.

상락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8교구 본사인 직지사의 말사로 시내 중심에 위치하고 있어 참배객들의 방문이 쉽다. 상주 불교 포교당으로 1921년 설홍스님이 창건하여 오늘에 이르며, 상주 지방 불교 부흥과 보급에 크게 기여해 온 사찰이다. 당초 포교당이던 사찰명을 2002년 상락사(常樂寺)로 바꾸었다.

상사마을은 전국 최장수 마을로 유명한 곳이다. 장수마을에는 항상 좋은 물이 있게 마련인데 사도리의 경우 당몰샘이 장수의 비결이라고 믿는다. ‘지리산 약초 뿌리 녹는 물이 다 흘러든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당몰샘에서 나오는 샘물의 효능 덕분에 마을에 장수하는 사람이 많다는 뜻이다. 당몰샘 옆에 위치하고 있는 쌍산재는 사도리의 유명한 집으로 예능프로그램인 ‘1박 2일’, ‘윤스테이’ 촬영지이기도 했다. 쌍산재는 유명한 고택치고는 작은 대문을 가지고 있다.

청산면 상동리의 상서마을은 마을 전체가 돌담으로 이루어져 있다. 상서마을의 돌담들은 흙을 사용하지 않고 돌로만 쌓은 전형적인 강담 구조를 띠고 있다. 1970년대 초 새마을운동으로 인하여 마을 길을 넓히느라 일부 담장을 옮기기도 하였지만 대체적으로 원형 그대로 잘 보존이 되어 있다.

포항 상달암은 양동마을 경주손씨 입향조이자 조선 전기 문신인 손소의 묘를 조성할 때 묘소를 수호하고 망자의 명복을 빌기 위한 분암이다. 인근에 있던 분암(제사를 위한 시설)을 기반으로 하여 1484년에 중건된 재실 건축으로, 이후 1595년과 1786년에 각각 수리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상달암은 ㄱ자형 평면을 갖는 맞배지붕 건물로, 1484년 중건 당시 누마루(화수루) 부분이 덧붙여져 현재와 같은 모습을 갖게 되었다.

일반적으로는 미륵불로 불리지만 형태로 볼 때 관세음보살을 표현한 것이다. 머리에는 초화문장식의 보관을 쓰고 있으며, 중앙에는 변화한 부처님을 상징하는 작은 화불이 조각되어 있고, 양옆의 머리띠 매듭은 어깨까지 내려와 있다. 얼굴은 길쭉하지만 양볼이 두툼한 편이며, 눈은 지그시 감았고 오똑한 코 끝은 훼손되었다. 법의는 우견 편단으로 선간 되었으며, 왼쪽 어깨에는 오른쪽으로 자연스럽게 흘러내려 있다.

삼천사는 661년 원효대사에 의해 창건되었고, 『신증동국여지승람』과 『북한지』에 따르면 그 규모가 대단히 커서 3,000여 명이 수도할 정도로 번창했다고 한다. 사찰 이름도 이 숫자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측된다고 하지만 최근의 고고학적 조사를 거치면서 ‘三千’이 아니라 ‘三川’이라고 새겨진 기와가 발견되어 삼천사를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려 왕조의 마지막 임금인 공양왕(재위 1389~1392)과 그의 두 아들의 묘로 전해지고 있다. 일명 궁촌왕릉으로 불린다. 고려 공양왕 4년(1392년) 7월에 이성계가 조선 태조로 즉위하였다. 태조는 8월에 공양왕을 폐하여 공양군으로 봉하고 강원특별자치도 원주로 보내어 감시하다가 태조 3년 3월에 공양군과 그의 두 아들 귀양지를 삼척시 근덕면 궁촌리로 옮기고 한 달 뒤인 4월에 모두 처형했다.

1398년 현유의 위패를 봉안하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해 창건되었다. 1407년 옥서동 월계곡으로 이전하였다가 1468년 현재의 위치로 이건하였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정면 5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으로 된 대성전, 정면 7칸, 측면 1칸의 명륜당을 비롯하여 동재, 서재, 동무, 서무, 숙청재, 장경실, 신삼문, 직청, 동서협문, 제기고 등이 있으며 향교 밖에는 홍살문과 비군이 있다. 대성전에는 우리나라 18현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조선 선조 때 연원도(連元道) 찰방을 지낸 박계립(朴繼立)이 지은 17세기의 건물이다. 대전 보건 대학 담을 끼고 좌측으로 가면 송시열 유적지가 나오고, 그 뒤쪽으로 올라가다가 박팽년유허비(朴彭年遺墟碑) 아래쪽에 있다. 인근인 동구 가양동에서 태어난 그는 관직에서 물러난 후인 인조 22년(1644년) 이곳에 서당을 짓고 정원에 매화 세 그루를 심었으며, 사방에 정자를 세우고 버드나무 5그루를 심어서 오류정(五柳亭)이라 불렀다.

삼불암은 김제시 죽산면 불당마을에 있는 한국불교 태고종 소속 사찰이다. 오래전부터 불당마을에는 고기를 잡으러 나갈때 마다 공양을 드리는 석불상이 있었다고 한다. 어느 날 큰 해일이 일어 이 불상이 어디론가 묻혀버렸다.

영경묘는 조선 태조 이성계의 5대조 이양무 장군의 부인이자 4대 조인 목조 이안사의 어머니가 되는 평창 이 씨의 무덤이다. 원래 이양무와 함께 전라도 전주에 거주하였으나 이곳으로 이주하여 생활하다가 별세하였다. 후에 목조 이안사가 함경도로 이주하면서 수백 년 동안 잊혔다. 조선이 건국된 뒤 태조를 비롯한 조선의 임금들은 조상의 무덤을 찾으려고 매우 애썼다.

삼막사 남녀근석은 칠성각의 서북쪽에 위치한 2개의 자연암석으로 그 모습이 남자와 여자의 성기 모양을 닮았다. 남근(男根)과 여근(女根) 모양을 닮은 자연 그대로의 돌이다. 남근석의 높이는 150㎝, 여근석의 높이는 110㎝이며 서로 2m의 간격을 두고 떨어져 있다. 성기 숭배 신앙(phallicism)은 주로 성기를 닮은 바위나 기암괴석 등 자연물을 대상으로 하지만, 인위적으로 나무나 돌을 가지고 성기 모양을 만들기도 한다.

삼거동 고인돌군은 청동기 시대의 대표적 무덤이다. 삼거동 고인돌들은 모두 49기인데 반경 200미터 이내의 구릉에 분포에 있다. 두 개로 무리를 지어 있기 때문에 멀리서 보면 마치 바둑판처럼 보인다. 49기의 고인돌 중 20여 기는 덮개돌을 지탱하는 받침돌이 없으며, 덮개돌은 원형과 타원형으로 형태가 일정하지 않다. 23기로 이루어진 한 무리의 고인돌은 동서로 위치하고 있는데, 2기만 덮개돌이 1∼1. 3m로 두껍고 나머지는 얇은 편이다.

낙동강가 민씨 오우정(五友亭) 안에 있는 서원으로 연산군, 중종 때 학자인 민구령(閔九齡), 민구소(閔九韶), 민구연(閔九淵), 민구주(閔九疇), 민구서(閔九敍) 등 5형제를 배향하였다.

삼강강당은 조선 광해군 때의 학자 청풍자 정윤목(1571~1629)이 후진을 양성하기 위해 세운 건물이다. 정윤목은 서원부원군 정탁의 셋째 아들로 초서에 뛰어난 학자이다. 서애 류성룡, 한강 정구의 가르침을 받아 성리학에 정통했으며, 특히 필법이 탁월해서 초서의 대가로 존경받았다. 삼강강당의 건물은 삼강마을 동쪽에 있으며 낙동강변을 바라보고 있다. 강당의 오른쪽에는 학당이 있다. 뒤쪽은 사당이 있었던 자리로 현재는 철거되어 사라졌다.

삼가향교는 조선 세종 때에 세웠다고 하며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광해군 4년(1612)에 다시 지었다. 1826년 정우용이 대성전을 현재의 위치로 이건하였으며 이때 풍화루와 흥학당을 중수하였다. 대성전에는 5성, 송조 4현, 우리나라 18현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전체적인 건물배치는 공부하는 곳인 명륜당이 앞에 있고 제사를 지내는 곳인 대성전이 뒤에 있는 전학후묘의 형태이다.

지은 시기를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전하는 말에 따르면 약 70년 전, 조선 말기에 지은 것으로 추정한다. 마을 외곽을 도로가 두르고 있는 형태로 구성되어 있었다. 측면의 집과 대지가 나뉘는 형태 때문에 대문을 지나 폭이 좁은 담장사잇길을 지나도록 되어있다. 한 칸으로 구성된 가옥의 첫 대문을 지나 보이는 대문채가 인상적인데, ㄱ자로 꺾인 부분이 맞배지붕으로 구성되며 대청이 만들어져 있어서 사랑채 용도로 사용되지 않았을까 추측된다.

조선 중기의 유명한 유학자인 조식 선생의 유적지이다. 조식 선생은 많은 벼슬이 내려졌으나 모두 거절하고, 학문연구와 후진양성에 평생을 보냈다. 조식 유적은 두 곳으로 나뉘는데 사리(絲里)에는 산천재, 별묘, 신도비, 묘비가 있고, 원리(院里)에는 덕천서원과 세심정이 있다. 산천재는 선생이 학문을 닦고 연구하던 곳으로 명종 16년(1561)에 세웠고, 순조 18년(1818)에 고쳐졌다. 규모는 앞면 2칸, 옆면 2칸이다.
도천서원에 모시고 있던 청향당 이원과 죽각 이광우를 따로 모시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이원은 조선 전기의 학자이며, 이황 선생과 학문의 뜻을 같이 하였으며, 1546년에는 나라에서 벼슬을 내렸으나 거절하고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배산서원은 1771년에 덕연사만 세워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냈으나,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에 철거되었다. 그 뒤 1919년에 새로 지어 배산서당이라 하였다.
산청·함양사건 추모공원은 산청·함양사건 희생자 합동 묘역이다. 한국전쟁 중이던 1951년 2월 7일 국군 11사단 9연대 3대대가 지리산 공비토벌 작전인 ‘견벽청야’를 수행하면서 산청군 금서면 가현, 방곡마을과 함양군 휴천면 점촌마을, 유림면 서주마을에서 무고한 민간인 705명을 학살하였던 바, 이때 억울하게 희생된 영령들을 모신 묘역이다.

산운마을은 의성에서 대감마을로 불리는 전통반촌으로, 자연경관이 수려한 영천이씨[永川李氏] 집성촌이다. 마을은 수많은 전설을 간직한 금성산을 뒤에, 비봉산을 옆에 두고 나지막한 구릉과 평지에 자리 잡고 있다. 금성산의 마을 쪽 골짜기에는 저수지가 있어 골짜기를 따라 논이 펼쳐져 있다. 또한 마을의 남쪽에는 쌍계천이 흐르고 있어 주변에 농경지가 발달하여 있다. 풍수지리적으로는 전형적인 배산임수 지형에 ‘선녀가 거울 앞에 않아 머리를 빗는 절묘한 형국’이라고 말한다.

산양서원은 조선 시대 문신 황희(黃喜)를 제향 하기 위해 세운 소동사(召東祠)가 발전한 것으로, 1857년(철종 8년)에 건립되었다. 황희는 1423년(세종 5년) 강원도 관찰사로 부임하였으며, 당시 이 지방에 흉년이 들자 관고(官庫)를 열어 백성을 구제하였다. 이에 삼척 지방 주민들은 그의 은혜를 기려 돌을 쌓아 대(臺)를 만들고 ‘소공대(召公臺)’라 불렀다.
단성향교는 1127년에 유(賢儒)의 위패를 봉안, 배향하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하여 창건되었다. 서쪽 산기슭으로 옮겼다가 1752년에 현 위치인 교동으로 옮겨지었다고 전한다. 경사지에 위치하여 앞쪽에는 공부하는 공간인 명륜당이, 뒤쪽에는 사당인 대성전이 있는 전학후묘의 배치를 이루고 있다. 정문인 관선문을 들어서면 누각형식의 명륜당이 있는데, 대청 아래를 통하여 들어가도록 되어있다. 명륜당 밑을 통하여 내삼문과 대성전의 지붕이 겹쳐서 보인다.

단계마을의 옛 담장은 토석담이 주류를 이루며 전형적인 농촌 가옥들과 어우러져 독특한 풍경을 이루고 있다. 담 높이는 2m 정도로 큰 돌만 이용하여 메쌓기를 한 후 위에 좀 더 작은 돌과 진흙을 교대로 쌓아 올렸다. 담 위쪽에는 기와가 흘러내리는 것을 막기 위해 넓고 평평한 돌을 담장 안팎으로 6~7cm 정도 내밀게 했다. 인근 관광명소로는 산청 산골 박물관, 월명산 등이 있어 함께 둘러보기 좋다.
전라북도 순창군 팔덕면 산동리 남근석은 남자 성기 모양으로 자연암석이나 암석을 조각하여 세운 것으로 복을 받거나 다산 풍농, 풍어를 기원하는 민간신앙의 대상이 되고 있다. 산동리마을 앞 당산나무 부근에 자리한 이 남근석은 화강암으로 정교하게 조각되었다. 생김새는 건장한 남성의 성기가 충분히 발기되어 있는 모양으로 아랫부분에 연꽃무늬가 조각되어 있는 점이 독특하다.
향교는 훌륭한 유학자를 제사하고 지방민의 유학교육과 교화를 위하여 나라에서 지은 교육기관이다. 조선 세종 3년(1421)에 세워 유교를 공부했던 곳이다. 세종 22년(1440)에 향교 관계자들의 거처인 치성재, 학생들의 거처인 동·서재, 공부하는 장소인 명륜당, 휴식공간인 풍화루를 새로 지으면서 이름을 ‘수학원학사서재’로 바꾸었다.
사충서원은 ‘네 명의 충신을 모신 서원’이라는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으로 1725년(영조 1) 노론 4충대신인 김창집, 이이명, 이건명, 조태채를 제향 하기 위하여 노론계 관료와 유생이 추진하고 국가의 보조에 의하여 경기도 과천(현 동작구 노량진동)에 건립되었다.

김제시 산동리의 사현사는 1934년 당시 이곳에 거주하던 봉성 온(溫)씨 문중의 집안 사당으로 대율리에 세워진 것이다. 사현사는 1934년 세워진 봉성온씨 문중 사당이다. 당시에는 대율리에 세워졌으나 1967년 대율저수지가 축조되면서 수몰되기에 이르러 김제시 금구면 산동리 지금의 위치로 옮겨 지었다. 이 사당은 온신을 중심으로 온림, 온윤, 온후를 모시고 있다. 특히, 온달 장군과 온군해 장군의 단이 설치되어 있다.

사양서당강당은 본래 조선 시대 서원으로, 1651년(효종 2) 유학자 한강 정구(1543~1620)가 일생 동안 학업을 닦던 사수동에 창건된 후 1694년(숙종 20)에 지천면 신리 섬마 마을로 옮겨 한강 선생을 주벽으로 석담 이윤우를 배향하고 송암 이원경을 별사에 모셨다.
사산사는 1670년(현종 9년)에 서원으로 창건하였다. 1700년(숙종 26년)에 사우로 중건하고, 함평이씨 시조 함풍군 언, 전라좌수사 춘수, 효우당 접의 삼위를 초향 했다. 1778년(정조 2년)에 함성군 장양공 종생, 기성군 긍 이위를 추가 배향하고 향사우로 봉향하였다. 1868년(고종 5년)에 국령으로 사우를 훼철하였고, 1872년(고종 9년)에 사당 내 유허비와 제단을 세우고 제사를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