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명종대왕태실및비
태봉골의 구릉 정상부에 위치한 명종대왕태실및비는 조선 제13대 왕 명종의 태를 봉안한 곳이다. 명종대왕태실 앞에는 기념비 3기가 있다. 명종대왕태실과 오른쪽에 위치한 비는 1538년(중종 33)에 건립되었고, 왼쪽에 있는 비는 1546년(명종 1), 가운데에 있는 비는 1711년(숙종 31)에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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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봉골의 구릉 정상부에 위치한 명종대왕태실및비는 조선 제13대 왕 명종의 태를 봉안한 곳이다. 명종대왕태실 앞에는 기념비 3기가 있다. 명종대왕태실과 오른쪽에 위치한 비는 1538년(중종 33)에 건립되었고, 왼쪽에 있는 비는 1546년(명종 1), 가운데에 있는 비는 1711년(숙종 31)에 세웠다.

강원도 양양군 현북면 만월산에 위치한 사찰이다. 고려 목종 12년(1009), 혜명대사와 대주대사가 오대산 동쪽에 있는 만월산에 터를 잡고 창건한 절이다. 두 대사의 이름을 한 글자씩 따서 ‘명주사’라 이름 지었다. 창건 당시에 비로자나불을 모셨다는 점에서 화엄종 계통의 사찰이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 후기에 화재로 인해 절의 당우를 여러 번 중건하였고, 1910년대에는 건물이 총 15동에 이르는 대가람을 이루기도 했다.

명월대는 조선 말기 지방 유학자들과 시인들이 어울려 풍류를 즐기던 곳이다. 대는 마을을 끼고 있는 천변 중앙의 자연암벽 위에 8각형의 석축을 3단으로 쌓고 그 위에 원형의 반석을 만들었으며, 최근에 와서 콘크리트 처리를 하였다. 그 옆에는 석비가 세워져 있는데, 앞면에 '명월대'라고 음각되어 있다. 또 명월대 주변에 1910년 경에 만들어진 돌다리가 있는데, 이는 제주도에서는 흔치 않은 석교이다.

서울 관악구 청룡동에 있는 명락사는 관악산 줄기의 끝자락 도심 상업지역에 있다. 40여 년 넘게 서울 서남권의 포교 활동과 다문화가정을 위한 포교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사찰이다. 청년회가 활성화되어 있으며, 토요일 저녁 8시 30분부터 정기 법회를 갖는다. 2호선 봉천역과 서울대입구역 중간지점에 있다.
서원은 훌륭한 유학자의 제사를 지내고 지역민을 교육하기 위하여 설립한 조선시대 지방의 사립 교육기관이다. 명곡서원은 해주 최 씨 문중을 중심으로 세워진 서원으로 당초 장흥에 있었으나 1984년 군동 신기마을로 옮겨왔다. 성재 최충, 송탄 최유선, 동산 최자, 강호 최만리, 호은 최우 등 5위의 성현이 모셔져 있다. 건물은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집이며 신실은 정면 3칸, 측면 1칸 반으로 명곡사란 액자가 걸려있다.

명봉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8교구 본사인 직지사의 말사이다. 875년(헌강왕 1) 두운이 소백산 자락에 창건하였다. 1662년(현종 3) 화재로 전소된 뒤 여러 승려들이 힘을 모아 중건하였다. 1668년 다시 화재로 소실되자 신익 등이 중창의 뜻을 세우고 10여 년 동안 시주를 얻어 크게 중창하였다. 6·25전쟁 때 전란으로 소실된 것을 1955년 주지 만준이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봉산면 제월리 제봉산 자락에 위치한 면암정은 1533년(중종 28) 송순(宋純)이 건립한 정자로 이황(李滉)을 비롯하여 강호제현들과 학문을 논하며 후학을 길러내던 곳으로 유명하다.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추녀 끝은 4개의 활주가 받치고 있다. 목조 기와집으로 측면과 좌우에 마루를 두고, 중앙에는 방을 배치하였다. 현재의 건물은 여러 차례 보수한 것으로, 1979년에는 지붕의 기와를 교체하였다.
면천향교는 다른 지역의 향교들과 달리 최초 창건 위치를 이동하지 않은 몇 개 안 되는 향교이다. 현재의 위치는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군에서 동쪽으로 2리 떨어져 있다는 기록과도 일치하고 있다. 세운 시기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태조 1년(1392)에 세웠다고 전한다. 창건 이후의 면천향교 변화를 알 수 있는 최초의 기록은 1716년(숙종 42년) 학교등록의 기사로, 면천향교의 대성전 서벽과 신문을 수리한 사실이 적혀있다.
황현 생가는 1910년 일제강점기에 항거하여 자결 순국한 황현이 태어난 곳이다. 황현(1855~1910)은 1888년 생원시에 급제하였으나 부정부패가 만연한 현실 정치에 실망하여 관직에 진출하기 않고 평생 초야에 묻혀 지냈다. 동학농민운동을 생생하게 묘사한 「오하기문」과 1864년부터 1910년 경술국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시대상을 기록한 「매천야록」을 남겼다. 1905년 11월 을사늑약에 통분하여 중국 망명을 시도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북한군의 남침 직후 맥아더 사령관이 미군의 참전 결정에 앞서 한강방어선 전황을 확인하기 위해 시찰한 장소이다. 1950년 6월 29일 수원비행장에 도착한 미 극동군 사령관 맥아더는 전쟁 상황에 대한 보고를 받았다. 이어 전선을 직접 확인하기로 하고, 시흥을 거쳐 한강 전선을 마주한 영등포 동양맥주공장(현 영등포공원) 옆 언덕으로 이동하여 전황을 관찰하였다.
매천 황현(1855~1910) 선생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황현 선생은 한말의 순국지사이자 시인이며 문장가이다. 전남광주통합특별시 광양에서 태어났으며 어려서부터 시를 잘 짓고 재질이 뛰어났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갑오경장·청일전쟁이 연이어 일어나자 위기감을 느끼고, 경험과 견문한 바를 기록한 ‘매천야록(梅泉野錄)’· ‘오하기문(梧下記聞)’을 지어 후손들에게 남겨 주었다.

매림서원은 1707년에 지방 유림의 공의로 조선시대 의학자인 곽수강과 학자 오선기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시기 위해 세워진 서원이다. 선현 배향과 지방 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오던 중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에 훼철되었으나, 그 뒤 1981년에 복원하여 오늘의 모습에 이르고 있다.

매산서원은 삼우당[三憂堂] 문익점[文益漸]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세조 때에 경상남도 거창과 산청 지방 유림의 공의[公議]로 건립되었다. 그 후 목은 이색과의 친분을 감안하여 추향하고 매산[梅山]이라는 이름으로 사액받았다. 그러다가 병자호란 때 후손인 문겸[文謙]이 지금의 위치로 이건하여 춘추로 제향해 왔으나,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1868년 훼철되었다.

1705년(숙종 31)에 송원기(1548∼1615)를 향사하기 위해 건립된 서원이다. 후대에 그의 후손인 송명기, 송이석 부자를 추가로 배향하였다. 1868년(고종 5)에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된 이후 복건과 소실되기를 반복하다 2006년에 복원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매양서원은 주향인 송원기의 입묘를 계기로 칠곡에 이주, 정착하여 세거해온 야로 송 씨 문중의 성장 과정을 잘 보여준다. 조선 후기 칠곡지역의 대표적인 문중서원 중 하나이다.

안성 봉업사지 인근에 있는 높이 3. 9m의 보살상이다. 볼륨감 없이 평평한 돌기둥 같은 신체에 전체적으로 세부를 정교하게 조각하지 않고 높은 원통형의 보관에 사각의 보개(寶蓋 ; 인도에서 귀인의 외출 시에 사용하던 양산을 불상의 머리 위에 갓처럼 씌운 것)까지 얹은 표현은 고려 전기 불상의 양식적인 특징이다. 보개는 이후 변형을 이루면서 충청도와 경기 남부를 중심으로 한 불상에 많이 나타나는 고려 전기 불상의 특징이다.

망경암은 전통사찰 74호로 성남에서 서울을 한눈에 내려다보기 가장 좋은 영장산 자락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은 고려말부터 조선초에 이르기까지 임금이 친히 들러 나라의 번영과 백성들의 안녕을 빌었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망경암에 오르면 경기도 유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망경암 마애여래좌상을 볼 수 있다. 이 마애여래좌상은 망경암(望京菴) 암벽에 새겨진 마애불이다.

로하스파크에서 옥계마을을 지나 평화누리길 3코스를 따라 걷다보면 청화산과 망곡산을 지나가는 숲 등산로가 나온다. 구간의 거리는 약 4. 5km정도이며 야산의 소로길을 이용하는데 특히 망곡산에는 사색의 오솔길이라는 자그마한 소로길과 체육공원 정상의 팔각정 등이 조성되어 있어 일상의 상념에서 벗어나기에 부담이 없는 코스이다.
정읍시 이평면 면사무소 앞 도로 건너편에 위치한 말목장터는 1894년 동학농민운동 당시 배들평 농민 수천 명이 고부로 가기 전에 모였던 곳으로 제1차 백산기포를 할 때까지 장두청을 두고 진을 설치했던 장소이다. 또한 이곳에는 180년 정도 된 감나무 한그루가 서 있는데, 이 나무 아래에서 말목장터에 모여든 농민들에게 전봉준이 군수 조병갑의 탐학과 농민 수탈의 실정을 알리고 농민봉기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고 전한다.
망금산은 13척의 배로 3백여 척의 왜선을 물리친 명량해전지 울돌목이 바로 내려다보이는 해발 115m의 나지막한 산이다. 명량해전 당시 이순신 장군은 적에게 우리 군사가 많이 보이게 하기 위하여 이 망금산에 토성을 쌓고 부근의 부녀자들을 모아 남장을 시켜 산봉우리를 원을 그리며 반복하여 돌게 하였다고 한다. 주로 추석날 밤, 곡식의 풍년을 기원하며 추던 부녀자들의 민속놀이를 의병술로 사용한 것이다.
만세고개는 경기도 안성시 원곡면과 양성면 사이의 고개이다. 1919년 4월 1일 원곡면 주민들이 만세 시위를 벌인 곳이다. 원래의 이름은 성은고개 또는 양성고개이다. 3. 1 독립운동이 한창이던 1919년 4월 1일 밤 원곡면민 1,000여명이 만세고개에 이르러 태극기를 들고 독립 만세를 외치며 결의한 뒤 양성으로 돌진하였다. 양성 주민 1,000여 명과 합류하여 일본의 기관들을 불태우고 이 지역을 2일간 해방시켰다.
제주고씨 고인상이 선조 문충공 고경을 주벽으로, 문영공 고용현과 화당 고만욱을 추배하기 위해 건립한 서원이다. 고창군 신림면 무림리 만화마을에 위치해 있다. 문충공파 파조 고경은 고려말의 문신으로 호는 휴옹, 시호은 문충 또는 문영으로 이부상서 백연의 아들로 다섯 살에 시를 지었고 열두 살에 논어를 외우니 당시에 옥산의 신동이라 하였다. 충렬왕 18년(1292) 16세에 친명으로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다.

대한불교조계종 제21 교구 본사인 송광사의 말사인 만연사는 고려 희종 4년(1208)에 만연선사에 의해 만연산(나한산) 아래에 창건되었다고 전한다. 만연선사가 무등산 원효사에서 수도를 마치고 조계산 송광사로 돌아가는 도중에 만연산 중턱에 이르러 피곤한 몸을 잠시 쉬어가고자 언뜻 잠이 들어 꿈꾸었는데, 십육나한(부처에게 위임받은 제자들)이 석가모니불을 모실 역사(토목이나 건축)를 하고 있는 꿈이었다.

전라북도 순창군 구림면 안정리 회문산 자락에 있는 만일사는 백제 무왕(673년) 때 처음 세워진 사찰로 조선 초기 이성계가 임금이 되기 전 무학대사에 의해 중건되었다. 그 후 6. 25 전쟁으로 완전히 소실된 것을 1954년에 다시 세웠고 1998년에 일주문, 대웅전, 요사채 각 1동씩을 건립하였다. 만일사라는 명칭은 무학대사가 이성계를 임금의 자리에 오르게 하고자 만일 동안 이곳에서 기도하였다는 데에서 유래되었다.

이곳은 만석대교와 제방 사이에 위치한 고부군수 조병갑이 쌓은 만석보의 터다. 보(洑)란 논에 물을 대기 위한 목적으로 둑을 쌓고 냇물을 가두어 두는 곳을 말한다. 신태인에서 고부로 가는 지점의 동진강을 건너는 다리 하류에는 보뚝을 쌓았던 흔적이 남아 있다. 주위에는 넓고 비옥한 배들 평야가 펼쳐져 있다. 이 너른 평야에서 1만 석이나 되는 많은 쌀을 거둬들일 수 있다 하여 만석보라 이름하였지만, 굶주리고 착취당해야 했던 농민들의 분노가 서려있기도 하다.

영천 만불사는 승려 학성이 기존과는 다른 현대 불교의 서원을 이루고자 1987년 서울, 부산, 대구에 포교원을 설립하며 시작되어, 1995년 완공한 만불산에 있는 사찰이다. 창건에 앞서 만불보전 건립, 부처님 진신사리 이운, 노천 아미타입불 봉안 등 많은 불사를 진행 하면서 현대 불교의 전파와 함께 문화·의료·복지에 큰 힘을 쏟았다.
만뢰사는 조감의 위패를 모셔 놓고 그 공적을 후손이 기리도록 하고 있다. 병자호란 당시 의병장인 조감은 만노성에서 유창국과 더불어 통솔자가 없어 방황하는 수천 명의 피난민을 이끌고 만노성에 침입한 외적을 물리친 공을 세웠다. 조감은 사후에 예조판서에 올랐다. 1851년(철종 2) 백곡면 가죽리에 죽계사를 세워 김유신과 함께 조감을 배향하였다가 고종 때의 서원철폐령으로 죽계사가 철거되면서 배향을 하지 못하였다.

만기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2교구 본사인 용주사의 말사이다. 942년(태조 25년) 남대사가 창건하였으며, 조선 세조 때 왕명으로 중수하였다. 이 사찰에는 어정이라고 불리는 우물이 있는데, 세조가 이곳을 지나다가 우물의 물을 마시게 되었는데 물맛이 특이하여 샘 이름을 감로천이라 명명하였다고 한다.
대한불교 조계종 소속의 사찰인 마하사의 창건과 변천은 대웅전 상량문에 자세히 전하며, 아도 화상이 창건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임진왜란 때 사찰 건물이 모두 불탔고, 단계적으로 사찰이 복원되었다. 1970년 승려 문성이 대웅전·응진전·대방·요사·식당을 중건했고, 1985년 승려 지연이 종각을 세우고 반야암을 중창했으며, 1998년 승려 경민이 대웅전과 삼성각을 중건하였다.
마포 전차 종점은 현재는 서울 지하철 5호선 마포역에서 마포대교 진입 구간을 이른다. 일제강점기부터 1960년대 말까지 서울 중심부를 오가던 전차의 종점이 있던 곳이다. 이 장소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지점으로 1919년 3월 1일 오후 8시경 약 1,000명의 군중이 모여 독립 만세 시위를 벌인 3·1 운동 만세 시위지이다.
향교는 공자와 훌륭한 유학자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며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해 설립된 고려·조선시대의 국립 교육기관이다. 조선시대에는 국가로부터 토지와 노비 등을 지급받아 교관이 교생을 가르쳤으나, 1894년 갑오개혁으로 근대 교육이 본격화되면서 교육적 기능은 폐지되었다. 만경향교는 1407년(태종 7)에 창건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동해 시청에서 동쪽으로 1㎞쯤 떨어진 동해안에 있는 만경대는 삼척 김 씨 김훈이 만든 정자이며, 그동안 풍파로 폐허가 된 것을 60년 전에 삼척 김 씨들이 다시 세웠다. 정자에 올라 동쪽을 바라보면 망망대해가 파도치는 모습이 눈앞에 보인다.
태백산과 함백산을 잇는 등산로 중간에 자리하고 있다. 화방재 바로 근처이기도 하다. 등광사 근처에는 등산으로 유명한 함백산, 태백산, 장산이 있다. 운동화나 등산화를 신고 가는 것을 추천한다.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보니 올라가는 길이 가파르다. 그러나 함백산과 태백산이 대표적인 겨울철 산행지인 만큼 날을 잡고 등산 코스로 다녀오는 것도 나쁘지 않다. 특히나 함백산의 설경은 태백 8경에 해당하며 우리나라에서 신성시되는 산이기도 하다.
조선 전기의 문신 류순정(1459~1512)과 무신인 그의 아들 류홍(1483~1551)의 묘역이다. 류순정과 류홍 부자는 공을 세운 공신으로, 이 묘역은 16세기에 조성되었다. 오늘날 서울 지역에서 유일한 부자(父子) 2대 공신묘역으로, 돌로 만들어 묘 앞에 세워 둔 석물들의 양식과 묘역의 조성 형태로 조선시대 공신의 묘를 세우던 관습이나 제도 등 묘제의 특징을 파악할 수 있는 가치를 지닌다.

조선개국과 정란공신(태종 이방원의 집권에 기여한 관리)인 마천목 장군 선대에 장흥에서 이주해 왔다고 한다. 성황당이 있고 당제를 올리는 마을이어서 당산마을이라 했고 침곡과 송정 중간에 있고 고달면 두계 앞에 있는 어살(어전)을 도깨비살이라 했다. 마천목 장군이 어릴 적 어머니가 병을 얻어 물고기를 원하자 섬진강변에 나갔다가 이상하게 푸른 돌을 주워왔는데 도깨비들이 몰려와 두목 도깨비를 돌려주면 무엇이든지 다하겠다고 했다.

마산향교는 창원특례시 마산합포구 진동면 교동리에 있으며 1414년(태종 14) 진해현이 설치되면서 진해향교로 창건되었으나 임진왜란 때 방화로 소실되었다. 인조 때 재건하였으나 1920년 일제의 강압으로 철폐되었으나 1990년에 창원군 향교로 복원되었고 현재의 건물도 재건되었다. 입구의 외삼문은 맞배지붕을 올린 솟을삼문이며 학문을 강의하는 명륜당은 정면 5칸 규모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둔촌 이집 묘역은 성남시 중원구 하대원동에 있는 고려 후기의 문신 이집의 묘역으로, 부인 정화택주 영주 황 씨와의 원형 합장묘이다. 이집은 고려 후기 문신으로, 충목왕 때 과거에 급제하여 해박한 지식과 고상한 지절로 이름이 높았다. 1368년 신돈의 비행을 비판한 후 화가 미칠 것을 예견해 아버지를 업고 도망하여 영천에서 은거하였다. 이후 신돈이 역모로 주살된 후 수양산 아래 현화리에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