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원서원
백원서원은 효자로 이름이 났던 전귀당(全歸堂) 서시립(徐時立)(1578~1665)을 제향 하는 서원이다. 서시립의 자는 입지(立支), 호는 전귀당이며, 달성서씨 감찰공파 파조인 서근중의 6세손이다. 서시립의 호 전귀당은 임진왜란 이후 오봉 이호민이 왕자 태실사(胎室使)로 대구지역에 들렀다가 서시립의 효행을 듣고 지어준 호이다. 온전한 몸으로 태어나 온전하게 돌아간다는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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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원서원은 효자로 이름이 났던 전귀당(全歸堂) 서시립(徐時立)(1578~1665)을 제향 하는 서원이다. 서시립의 자는 입지(立支), 호는 전귀당이며, 달성서씨 감찰공파 파조인 서근중의 6세손이다. 서시립의 호 전귀당은 임진왜란 이후 오봉 이호민이 왕자 태실사(胎室使)로 대구지역에 들렀다가 서시립의 효행을 듣고 지어준 호이다. 온전한 몸으로 태어나 온전하게 돌아간다는 의미이다.

※ 25년 3월 산불로 인해 개호송 숲 출입이 불가함으로 방문 전 참고 부탁드립니다. . text202503{ COLOR: #FF0000; } 백운정은 귀봉 김수일(1528∼1583)이 그의 부친인 청계 김진(1500∼1580)으로부터 부지를 받아 선조 1년(1568)에 지은 정자이다. 김수일은 과거에 합격하였으나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고향에 남아 자연과 더불어 학문 연구와 후진양성에 힘썼다.
백운암은 1886년(조선 고종 23) 진령군 파평윤씨가 세운 법주사의 말사이다. 창건주 윤 씨는 본래 무당이었는데 임오군란이 일어나 명성황후가 장호원읍으로 피난 왔을 때 곧 궁으로 돌아가게 될 것을 예언하여 진령군 여대감이라는 벼슬을 얻었다. 이후 꿈에 흰옷을 입은 철불이 나타나 지금의 자리에 절을 지으라고 계시하여 지은 절이다. 1977년 중창하였고 현존하는 건물로는 법당과 삼성각과 요사채 등이 있다.
백운사는 고려 27대 충숙왕(忠肅王) 8년(1321)에 창건되고 조선 영조(1725- 76) 때 폐사(廢寺)된 대흥사(大興寺) 옛터에 1930년 하장우(河長雨) 스님이 초막 4칸을 세우고 ‘백운사’라 이름한 사찰이다. 대흥사의 창건주는 미상이며, 구전에 의하면 이곳에서 기거한 스님들이 힘자랑을 하다가 살인을 했기 때문에 폐사되었다고 한다. 백운사 창건 이후 수차에 걸친 화재로 소실과 중창을 거듭하였는데, 현재까지 대웅전, 요사채 등의 중건이 진행되고 있다.
백운사는 익산시 여산면 호산리에 있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7교구 본사 금산사 소속 사찰이다. 창건 연대나 연혁을 알 수 있는 자료가 전혀 전하지 않는다. 다만 928년(신라 경순왕 2)에 승려 백양(白楊)이 지금의 위치에서 1. 5㎞ 떨어진 산 위쪽에 창건하여 ‘법당산(法堂山) 혜정사(慧定寺)’로 사찰 이름을 붙여 부르다가 그 후 ‘백운암(白雲菴)’으로 불렸다는 사실만 전해지고 있다.
남근석은 남자의 성기 모양을 한 자연 암석이나, 암석을 조각하여 세운 것을 말하는데, 사람들이 섬기는 민간신앙 중 성기 숭배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흰 바위 마을 입구 서쪽에 자리하고 있는 이 남근석은 이 마을에 있는 12 당산 중의 하나로, 일명 자지바우라고도 불린다. 높이는 1. 35m로 네모난 단 위에 길고도 곧게 뻗어 있다. 꼭대기 부분은 약간 뾰족하게 깎은 후 둥글게 처리하였다.
백산서원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동향의 맞배지붕 형식 사당이다. 1915년 만포 정제호와 모은 정동식의 후손들이 선조들의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세웠다. 익산의 연일정씨 가묘로 출발하였으나, 연재 송병선을 주벽으로 모시고 안양 정흥식을 추배 하면서 익산의 대표적인 충절 사당이 되었다. 송병선은 송시열의 후손으로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자결하였고,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 되었다.
서원은 훌륭한 유학자의 제사를 지내고 지역민을 교육하기 위하여 설립한 조선시대 지방의 사립 교육기관이다. 백산서원은 1928년 일제강점기에 창건된 이후 현재까지 이어져 오고 있으며, 조선 선조 때의 문신 청곡 윤찬을 비롯하여 구봉 윤여임, 죽계 백선남, 죽음 윤자선, 담재 윤자민 등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제사를 지내는 사당인 백산사는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 기와집이다. 무인 및 무관들이 모여서 강의를 하던 강당은 정면 5칸이다.
백석서원은 조선 효종 3년(1652년) 승반산에 세워졌던 하나의 사당이다. 유집(柳楫)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세워졌다. 고종 5년(1868년)에 대원군의 서원훼철령으로 철폐되었고, 1902년 지금의 자리에 앞면 3칸, 옆면 2칸 맞배지붕으로 된 한식 목조기와집을 다시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용인 향수산 중턱에 위치한 백련사는 용인시에서 가장 오랜된 사찰로 백련암이라고도 부른다. 801년(통일신라 애장왕 2년) 신응선사가 창건하였다. 현재 경내에는 대웅전과 지장전, 나한전, 요사채, 삼성각 등이 있다. 특기할 만한 문화재는 없고, 무학대사가 조성했다는 나한상은 모두 화강암으로 기법이나 조형이 특이하다.
백련사는 충청북도 제천시 봉양읍 감악산에 자리한 대한불교조계종 제5교구 본사 법주사의 말사이다. 삼국시대 신라의 승려 의상이 백련암으로 창건했으며 고려와 조선 때 여러 차례 중수, 중창하고 1910년 주지 윤인선이 산성 안인 현 위치로 옮겨 중창하고 백련사라 개칭하였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대웅전, 강당, 삼성각, 요사채 등이 있다.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옥산면에 있는 서원으로 조선 후기 권상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신 곳이다. 숙종 36년(1710)에 지방 유림의 공의로 창건하였다. 선현 배향과 지방 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오던 중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고종 5년(1868)에 허물고 치워졌다. 광복 후 유림과 후손들이 협력하여 복원하였으며 1965년에 보수하였다.

경주시 북쪽 소금강산 중턱에 자리한 백률사는 신라 법흥왕 14년(527) 불교 공인을 위해 순교한 이차돈을 기리기 위한 절이자, 신라의 불교 성지이다. 와 헌덕왕 때 작성된 에 따르면 이차돈은 법흥왕의 명을 받들어 불교를 공인하고 사찰을 짓기 위해 순교했는데, 참수형을 받고 이차돈의 목을 베니 흰색 피가 솟아 나오고 꽃비가 내리는 등 기이한 일이 일어났다.

백련사[白蓮寺]은 서울시 강북구 수유 4동 산 127-1번지 삼각산에 자리한 한국불교 태고종 소속 사찰이다. 북한산 첩첩산중에는 많은 사찰들이 자리하고 있다. 유구한 역사를 지니고 있는가 하면 터만 남아 이름을 전하기도 한다. 그러나 사찰의 역사가 오래되었건 되지 않았건 모두 부처님의 연화도량임에는 변함이 없음이다. 4·19 국립묘지에서 대동문으로 오르는 등산로 가에는 작은 가람이 자리하고 있다.
서대문 백련산 자락에 있는 천년고찰 백련사는 신라 경덕왕 6년(747)에 진표율사가 창건하였다. 당시는 정토사라 하였는데 조선조 정종 원년에 백련사라 개칭하였다. 조선 2대 임금인 정종이 왕위를 태종에게 물려주고 난 뒤에 요양차 이곳에서 머무르기도 했다. 조선 임금 세조의 딸 의숙옹주가 20세에 남편을 잃고 비통함을 달래기 위해 돌아다니다가 여기서 해동묵(엄나무)을 보고 인생의 참뜻을 깨달았다고 한다.

반구 서원은 ‘언양읍지’에 의하면 1712년(숙종 38)에 세웠다고 한다. 선현 중 정몽주와 이언적은 울산의 구강서원에 이미 봉안되었거니와, 정구를 봉안한 것은 그가 퇴계 문인이면서 언양과 그리 멀지 않은 성주 출신이라는 데서 근거를 찾은 것으로 보인다. 시경(詩經)의 반구 서원은 구강서원과는 달리 사액되지 못하였다. 이것은 언양 사림이 중앙의 정치세력과 연결하여 사액 운동을 벌일 수 있는 정치적, 경제적 실력이 부족했음을 의미한다.

배중손 사당은 고려 무신정권 때 몽골의 침략에 대항하여 조직된 군대인 삼별초의 장군 배중손을 배향하는 사당이다. 배중손 장군이 남도 진성 전투에 패한 후 굴포 해안 쪽으로 이동하다 당시 바다 뻘밭이었던 굴포 해안에서 최후를 마친 곳으로 전해오고 있다. 용장성은 고려시대 삼별초가 진도를 근거지로 관군과 몽고군에 항전했던 성이다. 현재 성의 대부분은 원형이 사라진 상태이며, 성지가 부분적으로 남아 있고 성내의 용장사지 및 행궁지가 보존되고 있다.

방호정은 신성계곡 절벽 위에 자리 잡은 유서 깊은 정자이다. 1619년 조선 중기 학자 조준도가 돌아가신 어머니를 생각하는 마음에서 세운 정자이다. 기존 암석이 잘게 부서진 것을 퇴적물이라 하고, 퇴적물이 쌓여서 굳은 암석을 퇴적암이라 한다. 퇴적물은 주로 흐르는 물에 의해 이동하다가 흐름의 속도가 느려지는 곳에 쌓인다. 이후 지하 깊이 묻혀 딱딱한 암석이 된다. 방호정의 퇴적암은 사암, 이암, 셰일 등으로 구성된다.

반기문 유엔사무총장 생가마을인 행치마을은 보덕산이 좌우에서 감싸안고 있으며, 온화하고 정겨운 느낌을 주는 마을로 생가, 기념관, 평화랜드 및 선영과, 사당, 돌로 만든 세계도(족보), 기념시비, 연못 등이 있다. 초가삼간 흙벽 집이었는데, 1970년대 새마을 사업 시 슬레이트 지붕으로 개조되었고, 2002년 3월 경에 철거되었다. 생가는 예전의 사진자료를 바탕으로 2010년 복원되었다.
조선 효종·현종 때 실학의 선구자인 반계 유형원(1622∼1673) 선생의 유적이다. 선생은 1648년 2차례에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낙방하고 효종 4년(1653)에 이곳으로 이사한 후 일생을 숨어 지냈다. 선생은 뛰어난 학문으로 거듭 벼슬자리를 받았으나 모두 사퇴하고, 평생을 학문에만 힘을 쓰다가 세상을 떠났다. 이곳에서 그는 『반계수록』26권을 펴냈다.
반곡서원은 우암 송시열선생이 1679년(숙종 5년) 거제도로 귀향을 왔을 때 머물렀던 곳에 세워진 서원이다. 거제 유림 윤도원, 옥삼헌 등이 문정공 우암 송시열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1704년(숙종 30년) 창건하였으며, 그 후 죽천 김진규, 몽와 김창집, 학공 이중협, 문충공 민진원, 정문공 김수근 등을 추가로 배향되었다.
반곡서원은 수선리 산정마을에 있는 조선 후기에 건립한 서원이다. 이 지방에 살고 있던 담양국씨들이 선조들의 절의와 효행의 높은 뜻을 기리기 위하여 1871년(고종 8년) 2월에 세워 1995년에 중건하였다. 반곡서원 입구에는 반곡사 중건기념비가 세워져 있고, 그 뒤로 반곡서원으로 들어가는 충효문이 있다. 경내에는 사당과 강당 외에 내삼문과 외삼문이 있고, 교직사 1동이 있다.

1963년 제5대부터 제9대에 이르기까지 5대에 걸쳐 대통령을 역임한 박정희 전 대통령의 생가로 대지에 생가, 안채, 분향소, 관리사 등 4동의 건물이 있다. 박 전대통령 생가는 1900년 경에 지은 15평 규모의 초가집으로 전형적인 농촌 가옥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이 집에서 1917년에 태어나 1937년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20년을 살았다.
제천에 있는 전통가옥으로 진주 강 씨 문중에서 자녀 교육을 목적으로 건립한 조선 후기의 건물이다. 강 씨 후손이 이곳에서 공부하고 제천 지역의 유력 사족으로 성장했다. 제천 상풍마을 초입에 제천 박약재 안내판과 진주 강 씨 유허비가 있고, 이곳으로부터 좌측으로 난 산길을 오르면 박약재가 나온다. 전면에 일각문을 세우고 주위로 막돌 담장을 둘렀다.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팔작지붕 집이고 앞에는 가운데 섬을 둔 작은 연못을 조성하였다.

독립운동가 박상진(1884~1921) 의사가 살았던 곳이다. 대지주였던 박상진 의사는 모든 재산을 독립운동 자금으로 사용하여 집안이 몰락하고 이 집도 남의 손에 넘어갔으나 2002년 울산시가 매입하여 2007년 복원 정비 사업을 완료하였다. 사랑채, 안채 등 모두 6동의 건물로 이루어진 기와집으로 전체적으로 볼 때 ㅂ자 구조를 가진 조선 후기 양반 살림집이다.

소설 '토지'의 저자, 소설가 박경리의 생가로 통영시 문학동에 위치해 있다. 생가 인근의 서문고개는 소설 '김약국의 딸들'의 무대이기도 해 표지석이 서 있으며 그 표지석이 있는 골목 안쪽 끝에 있는 건물이 박경리의 생가이다. 생가 주변에는 통영의 옛 정취가 남아 있는 골목길이 이어져 있다. 박경리 생가는 현재 선생과 연고가 없는 일반인이 살고 있어 집 내부를 관람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인근에는 통영의 관광명소 서피랑과 충렬사 등이 있어 함께 둘러볼 수 있다.
강진에 있는 박산서원은 1590년(선조 23) 강진읍 월남마을에 청연 이후백(1520-1578)을 제향 하기 위해 ‘서봉서원’이라는 명칭으로 창건했다가 1868년(고종 5)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 1924년 호남 사림들의 발의로 현 박산으로 옮겨 복설하고 액호도 ‘박산서원’이라 개칭하였다.
박곡서당은 조선 태종 때 경상도, 경기도, 풍해도 ‘황해도’ 관찰사와 예조판서를 역임한 전백영의 추모 재실이자 서당이다. 박곡서당은 상원리 박실에 있다. 본래 이 재실은 내상원[안상원] 선생 묘소 곁에 있었다. 이후 1871년 서원철폐령으로 인근 행정리 한천서원이 헐릴 때, 그 재목을 가져다 1872년경 안박실에 있는 정부인 인천이씨 묘소 옆에 재실을 다시 세웠다.

조선 후기의 문신이며 암행어사로 유명했던 기은 박문수(1691∼1756)의 묘소이다. 박문수는 조선 영조 때의 재상으로, 자는 성보, 호는 기은이다. 그는 왕명을 받고 여러번 어사로 출사하여 탐관오리를 숙청하고 어려운 백성을 구휼하는 등 그 공로가 인정되어 훗날 영의정이 되었다. 충청남도 천안시 북면 은지리 일대는 박문수의 사패지(임금이 내려준 논과 밭)로 알려져 있다.

바우덕이는 안성 남사당의 전설적인 인물이면서 한국 남사당 역사에서 유일무이하게 여성 꼭두쇠로 알려진 인물이다. 구전에 의하면 5살 때 머슴으로 살던 아버지가 병으로 사망하자 남사당패에 맡겨져 성장하면서 재주를 익혀 염불, 소고춤, 줄타기 등 남사당의 모든 기예를 익혔다고 한다. 15살 때 당시 안성 남사당패를 이끌던 윤치덕(꼭두쇠)이 사망하자 남사당패의 관례를 깨고 여성의 몸인 바우덕이를 우두머리인 꼭두쇠로 선출했다고 한다.

밀양 퇴로리 이씨고가는 여주이씨 자유헌(1656~1716)파의 종가집으로 조선 후기 1890년(고종 27)에 자유헌 이만백의 7대손인 항재 이익구(1838~1912)가 퇴로에 들어오면서 건립하여 100여 년 동안 5대에 걸쳐 옛 그대로 잘 보존하고 있는 전통 가옥이다. 이 집은 기와를 얹은 토담으로 구획된 부지에 남향으로 지은 목조 기와집으로 지금 남아있는 건물은 정침과 중사랑, 별채로 구성되어 있다.

월연정은 조선 중종 15년(1520) 월연 이태 선생이 지은 것으로 원래는 월영사가 있던 곳이다. 이태 선생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성리학에 입각해 개혁정치를 추구한 조광필 파가 죽음을 당하는 기묘사화(1519)가 일어나자 벼슬을 버리고 이곳으로 내려왔다. 월연정의 대청인 쌍경당은 임진왜란으로 불탔으나 영조 33년(1757)에 월암 이지복이 다시 지었다. 그리고 고종 3년(1866)에 이종상과 이종증이 정자 근처에 있는 월연대를 보수하고 재헌을 지었다.

민충사는 강원도 영월읍에 있는 사당으로 단종의 비운과 시녀들의 충절을 기리는 역사적 유적지이다. 이곳은 단종의 죽음을 애도하며 낙화암에서 투신한 시녀 6인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단종은 세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영월에 유배되었다. 금성대군이 단종 복위를 꾀하다 발각되자 단종은 17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였다.
민영환 자결터는 민영환이 을사늑약에 항거하다 자결하여 순국한 곳이다. 조선말의 충신 민영환은 을사늑약의 폐기를 궁궐 앞에서 주장하다가 일본 헌병의 강제해산으로 실패하자 1905년 11월 30일 새벽 6시에 청지기의 집에서 국민, 외교사절, 황제에게 보내는 유서 3통을 남기고 자결하였다. 순국 후 피 묻은 옷과 칼을 산청 마루방에 걸어두었는데 이듬해 5월 산청의 문을 열어보니 대나무 네 줄기가 마룻바닥과 피 묻은 옷을 뚫고 올라왔다고 한다.
미타암은 경상남도 양산시 웅상읍 천성산(千聖山)에 자리 잡은 대한불교조계종 제15교구 본사 통도사의 말사이다. 646년 원효대사가 창건한 것으로 전하며, 원효대사가 창건한 89암자 가운데 하나로 본다. 920년에 지공 대사가 중창하였다. 1376년에 중창했으며, 1888년에 다시 정진(正眞)이 중창하였다. 구한말에 우리나라의 선사상을 부흥시킨 경허(鏡虛)의 제자 혜명(慧明)이 주석했으며, 현재 그의 비석이 남아 있다.

옥수동에 자리한 미타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조계사의 직할 사찰로 달맞이봉공원 아래 위치해 있다. 또, 두뭇개에 있으므로 두뭇개승방이라고도 한다. 888년 신라 진성여왕 2년에 창건된 미타사는 금호동 부근에 대원 비구니 스님의 원력으로 창건되었으며 1115년 봉적 두 비구니 스님이 현재의 옥수동으로 옮겨 극락전을 건립하고 아미타불을 모신 후 국사로부터 미타사라는 사명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