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곡서원(거제)
반곡서원은 우암 송시열선생이 1679년(숙종 5년) 거제도로 귀향을 왔을 때 머물렀던 곳에 세워진 서원이다. 거제 유림 윤도원, 옥삼헌 등이 문정공 우암 송시열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1704년(숙종 30년) 창건하였으며, 그 후 죽천 김진규, 몽와 김창집, 학공 이중협, 문충공 민진원, 정문공 김수근 등을 추가로 배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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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곡서원은 우암 송시열선생이 1679년(숙종 5년) 거제도로 귀향을 왔을 때 머물렀던 곳에 세워진 서원이다. 거제 유림 윤도원, 옥삼헌 등이 문정공 우암 송시열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1704년(숙종 30년) 창건하였으며, 그 후 죽천 김진규, 몽와 김창집, 학공 이중협, 문충공 민진원, 정문공 김수근 등을 추가로 배향되었다.
반곡서원은 수선리 산정마을에 있는 조선 후기에 건립한 서원이다. 이 지방에 살고 있던 담양국씨들이 선조들의 절의와 효행의 높은 뜻을 기리기 위하여 1871년(고종 8년) 2월에 세워 1995년에 중건하였다. 반곡서원 입구에는 반곡사 중건기념비가 세워져 있고, 그 뒤로 반곡서원으로 들어가는 충효문이 있다. 경내에는 사당과 강당 외에 내삼문과 외삼문이 있고, 교직사 1동이 있다.

1963년 제5대부터 제9대에 이르기까지 5대에 걸쳐 대통령을 역임한 박정희 전 대통령의 생가로 대지에 생가, 안채, 분향소, 관리사 등 4동의 건물이 있다. 박 전대통령 생가는 1900년 경에 지은 15평 규모의 초가집으로 전형적인 농촌 가옥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이 집에서 1917년에 태어나 1937년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20년을 살았다.
제천에 있는 전통가옥으로 진주 강 씨 문중에서 자녀 교육을 목적으로 건립한 조선 후기의 건물이다. 강 씨 후손이 이곳에서 공부하고 제천 지역의 유력 사족으로 성장했다. 제천 상풍마을 초입에 제천 박약재 안내판과 진주 강 씨 유허비가 있고, 이곳으로부터 좌측으로 난 산길을 오르면 박약재가 나온다. 전면에 일각문을 세우고 주위로 막돌 담장을 둘렀다.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팔작지붕 집이고 앞에는 가운데 섬을 둔 작은 연못을 조성하였다.

독립운동가 박상진(1884~1921) 의사가 살았던 곳이다. 대지주였던 박상진 의사는 모든 재산을 독립운동 자금으로 사용하여 집안이 몰락하고 이 집도 남의 손에 넘어갔으나 2002년 울산시가 매입하여 2007년 복원 정비 사업을 완료하였다. 사랑채, 안채 등 모두 6동의 건물로 이루어진 기와집으로 전체적으로 볼 때 ㅂ자 구조를 가진 조선 후기 양반 살림집이다.

소설 '토지'의 저자, 소설가 박경리의 생가로 통영시 문학동에 위치해 있다. 생가 인근의 서문고개는 소설 '김약국의 딸들'의 무대이기도 해 표지석이 서 있으며 그 표지석이 있는 골목 안쪽 끝에 있는 건물이 박경리의 생가이다. 생가 주변에는 통영의 옛 정취가 남아 있는 골목길이 이어져 있다. 박경리 생가는 현재 선생과 연고가 없는 일반인이 살고 있어 집 내부를 관람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인근에는 통영의 관광명소 서피랑과 충렬사 등이 있어 함께 둘러볼 수 있다.
강진에 있는 박산서원은 1590년(선조 23) 강진읍 월남마을에 청연 이후백(1520-1578)을 제향 하기 위해 ‘서봉서원’이라는 명칭으로 창건했다가 1868년(고종 5)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 1924년 호남 사림들의 발의로 현 박산으로 옮겨 복설하고 액호도 ‘박산서원’이라 개칭하였다.
박곡서당은 조선 태종 때 경상도, 경기도, 풍해도 ‘황해도’ 관찰사와 예조판서를 역임한 전백영의 추모 재실이자 서당이다. 박곡서당은 상원리 박실에 있다. 본래 이 재실은 내상원[안상원] 선생 묘소 곁에 있었다. 이후 1871년 서원철폐령으로 인근 행정리 한천서원이 헐릴 때, 그 재목을 가져다 1872년경 안박실에 있는 정부인 인천이씨 묘소 옆에 재실을 다시 세웠다.

조선 후기의 문신이며 암행어사로 유명했던 기은 박문수(1691∼1756)의 묘소이다. 박문수는 조선 영조 때의 재상으로, 자는 성보, 호는 기은이다. 그는 왕명을 받고 여러번 어사로 출사하여 탐관오리를 숙청하고 어려운 백성을 구휼하는 등 그 공로가 인정되어 훗날 영의정이 되었다. 충청남도 천안시 북면 은지리 일대는 박문수의 사패지(임금이 내려준 논과 밭)로 알려져 있다.

바우덕이는 안성 남사당의 전설적인 인물이면서 한국 남사당 역사에서 유일무이하게 여성 꼭두쇠로 알려진 인물이다. 구전에 의하면 5살 때 머슴으로 살던 아버지가 병으로 사망하자 남사당패에 맡겨져 성장하면서 재주를 익혀 염불, 소고춤, 줄타기 등 남사당의 모든 기예를 익혔다고 한다. 15살 때 당시 안성 남사당패를 이끌던 윤치덕(꼭두쇠)이 사망하자 남사당패의 관례를 깨고 여성의 몸인 바우덕이를 우두머리인 꼭두쇠로 선출했다고 한다.

밀양 퇴로리 이씨고가는 여주이씨 자유헌(1656~1716)파의 종가집으로 조선 후기 1890년(고종 27)에 자유헌 이만백의 7대손인 항재 이익구(1838~1912)가 퇴로에 들어오면서 건립하여 100여 년 동안 5대에 걸쳐 옛 그대로 잘 보존하고 있는 전통 가옥이다. 이 집은 기와를 얹은 토담으로 구획된 부지에 남향으로 지은 목조 기와집으로 지금 남아있는 건물은 정침과 중사랑, 별채로 구성되어 있다.

월연정은 조선 중종 15년(1520) 월연 이태 선생이 지은 것으로 원래는 월영사가 있던 곳이다. 이태 선생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성리학에 입각해 개혁정치를 추구한 조광필 파가 죽음을 당하는 기묘사화(1519)가 일어나자 벼슬을 버리고 이곳으로 내려왔다. 월연정의 대청인 쌍경당은 임진왜란으로 불탔으나 영조 33년(1757)에 월암 이지복이 다시 지었다. 그리고 고종 3년(1866)에 이종상과 이종증이 정자 근처에 있는 월연대를 보수하고 재헌을 지었다.

민충사는 강원도 영월읍에 있는 사당으로 단종의 비운과 시녀들의 충절을 기리는 역사적 유적지이다. 이곳은 단종의 죽음을 애도하며 낙화암에서 투신한 시녀 6인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단종은 세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영월에 유배되었다. 금성대군이 단종 복위를 꾀하다 발각되자 단종은 17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였다.
민영환 자결터는 민영환이 을사늑약에 항거하다 자결하여 순국한 곳이다. 조선말의 충신 민영환은 을사늑약의 폐기를 궁궐 앞에서 주장하다가 일본 헌병의 강제해산으로 실패하자 1905년 11월 30일 새벽 6시에 청지기의 집에서 국민, 외교사절, 황제에게 보내는 유서 3통을 남기고 자결하였다. 순국 후 피 묻은 옷과 칼을 산청 마루방에 걸어두었는데 이듬해 5월 산청의 문을 열어보니 대나무 네 줄기가 마룻바닥과 피 묻은 옷을 뚫고 올라왔다고 한다.
미타암은 경상남도 양산시 웅상읍 천성산(千聖山)에 자리 잡은 대한불교조계종 제15교구 본사 통도사의 말사이다. 646년 원효대사가 창건한 것으로 전하며, 원효대사가 창건한 89암자 가운데 하나로 본다. 920년에 지공 대사가 중창하였다. 1376년에 중창했으며, 1888년에 다시 정진(正眞)이 중창하였다. 구한말에 우리나라의 선사상을 부흥시킨 경허(鏡虛)의 제자 혜명(慧明)이 주석했으며, 현재 그의 비석이 남아 있다.

옥수동에 자리한 미타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조계사의 직할 사찰로 달맞이봉공원 아래 위치해 있다. 또, 두뭇개에 있으므로 두뭇개승방이라고도 한다. 888년 신라 진성여왕 2년에 창건된 미타사는 금호동 부근에 대원 비구니 스님의 원력으로 창건되었으며 1115년 봉적 두 비구니 스님이 현재의 옥수동으로 옮겨 극락전을 건립하고 아미타불을 모신 후 국사로부터 미타사라는 사명을 받았다.

보문사와 담장 하나 사이에 있으며, 탑골승방으로 잘 아려진 미타사는 여승들의 거처이다. 이 사찰은 950년에 혜거국사가 처음 창건하고 미타사라는 이름을 지었다고 전해진다. 1047년에는 석탑을 조성하여 탑골승방이라 하였다. 석탑은 대웅전 뒤 단하각 왼쪽 언덕 위에 위치해 있다. 이 절은 131년에 혜감국사에 의해 중건되었고,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단종비였던 정순왕후 송씨에 의해 중수되었다.
미륵암은 전라북도 남원시 노암동에 있는 한국불교 태고종 소속의 암자로 신라 말 고려 초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된다. 미륵당과 법당, 요사로 이루어져 있다가 1992년 대웅전, 1994년 용화전과 산신각을 새로 지었다. 용화전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집으로, 내부에 절터에서 발견된 높이 192㎝의 고려시대 석불인 미륵암 석불이 모셔져 있으며 전라북도 문화재자료다.
미암사는 대한불교대각종 소속의 사찰로, 천애의 절벽을 이루고 있는 암벽에서 쌀이 나온다는 전설을 가진 경내의 쌀바위에서 이름이 유래하였다. 미암사는 602년 관륵이 창건하였다는 주장도 있지만, 확인된 바는 없다. 미암사는 화재로 여러 차례 소실되었다가 1967년 다시 세웠다. 1975년에는 쌀바위 앞에 정면 3칸과 측면 2칸으로 된 법당과 요사채를 고쳐지었다고 한다.

미륵사지 석등하대석은 익산 미륵사지 내 동원과 중원에 있는 2기의 하대석이다. 중원의 석등 하대석은 석탑과 금당지 사이에 있고, 동원의 석등 하대석은 탑과 금당 사이에 있다. 미륵사지 석등하대석은 원광대학교 마한백제문화연구소에서 1974년 8월 21일부터 9월 20일까지 실시한 [동탑지 발굴 및 서탑 기초 조사] 당시 풍탁 및 철물과 함께 발견되었다.

미륵사(彌勒寺)는 충북 증평군 증평읍에 자리한 대한 불교 조계혜능종 소속 사찰이다. 본 사찰은 수령이 300년이나 되는 느티나무 옆에 모셔진 석조관음보살입상을 빼고는 설명할 수 없는 듯하다. 고려 중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석조관음보살입상은 미륵사 보다 더 오래도록 지금의 자리를 지켜오며 대비보살로서 중생구제 원력을 펼치고 계신다. 관음보살의 영험이 알려진 것은 오래전 한마을 전체에 원인 모를 병이 돌아 매일 두세 명씩 죽어 나갈 때부터이다.

미륵사는 의상대사가 범어사를 창건한 해에 원효대사가 세운 절이다. 이곳에는 한가운데 위치한 염화 전 뒤편의 거대한 바위가 스님이 좌선하는 모양과 같다고 하여 ‘좌선바위’라 불리고 있다. 이 바위는 여러 개의 바위들이 모자이크 한 듯이 어울려 있는데, 해가 지고 난 뒤 바위와 바위 사이의 금이 보이지 않게 될 때 전체로 보면 그 형상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미륵사는 용인시 수지구 고기동과 동천동을 넘어가는 고개인 마구리 고갯길에 위치한 대한불교조계종 소속 사찰이다. 주지 승려 주허가 1980년대 말에 세운 작은 암자에서 포교 활동을 시작하였다. 보사전에는 나무로 만들어진 천수천안관세음보살을 모시고 있다. 이 관세음보살은 7m에 이르는 국내 최대 규모의 목조 천수천안관세음보살상으로 알려져 있다. 천수천안관세음보살 후벽에는 현세불인 석가모니 천불상이 있다. 보사전 동쪽 벽면에는 삼장탱화와 신중탱화가 있다.
미륵리 불두는 충주의 미륵사지에서 하늘재로 향하는 길가에 있는 불두이다. 불신은 없고 부처님 머리 조각이 미완성 상태로 놓였다. 2000년에 도난당했다가 2003년 다시 원래 위치로 돌아왔다. 이후 새로 만든 불신 위에 불두를 올려놓았다. 대형 화강암 불두로 이목구비가 뚜렷하게 남아있고, 눈매는 일자형으로 보이며 입도 일자형으로 다소 작게 표현되었고 입술 윤곽선이 선명하게 드러나 있다.
물계서원은 1712년(숙종 38) 지방 유림의 공의로 성송국, 성삼문, 성담수, 성수침, 성운, 성제원, 성혼, 성윤해 등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그 뒤 성여환, 성희, 성수경, 성문준, 성람, 성여신 등을 추가 배향하고, 1814년(순조 14) 성안의, 1857년(철종 8)에 성준득을 추가 배향하였다.
서원은 훌륭한 유학자의 제사를 지내고 지역민을 교육하기 위하여 설립한 조선시대 지방의 사립 교육기관이다. 미강서원은 조선시대 학자인 매곡 배숙(1516~1589)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건립되었다. 이후 서원철폐령 등의 두 차례 철거에도 불구하고 다시 현재 위치에 재건됨으로써 산수에 노닐면서 도의를 추구했던 배숙의 인문정신을 음미할 수 있다는 점에서 문화사적 의의가 있다. 입구에서 돌계단을 올라 척강문을 지나면 미강서원이라는 현판이 달린 강당이 자리한다.

고창의 선운사, 질마재 부근 진마마을에 위치한 미당 서정주의 생가이다. 미당은 어린 시절 이 집에서 서당을 다니다가 10살 때 인근의 줄포로 이사하여 줄포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5세 때인 1929년 서울 계동에 있는 중앙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이곳은 그가 아홉 살 무렵 부안 줄포보통학교에 입학하려고 이사 가기 전까지 살던 집인 것이다.

대구광역시 군위군 부계면 창평리에 있는 문양서원은 1793년(정조 17) 이언을 모시기 위하여 건립되었으며,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72년에 복원되었다. 오랫동안 이 지역에서 세력을 형성해 온 흥양 이씨 문중에서 소유와 관리를 맡고 있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사당인 경현사와 강당, 외삼문인 회진문, 동재 등 총 4동의 건물로 구성되어 있으나, 서재의 경우 시멘트로 수리·보수되어 과거의 구조 형식을 알 수 없다.
문창서원은 옥구향교 구내에 위치해 있다. 자천대와 마주 보는 곳에 담장으로 둘러싸인 정면 3칸 규모의 건물이다. 당나라에서 돌아왔을 때 세상의 인심이 어지럽고 어수선하자, 자천대에 올라 책을 읽으며 근심과 걱정을 달랬다고 하는 최치원 선생을 모신 사당인데 시호인 문창후를 서원명으로 쓴 것이다. 현재 걸려있는 문창서원이라는 편액은 신해년 박정희 대통령이 썼다고 한다.

청주시 우록리에 있는 문효 영당은 1708년(숙종 34)에 문효공 영의정 경재 하연과 정교 부인 성산 이 씨 부부 영정을 봉안한 진주 하 씨 집안의 사당으로 일명 타진당이라 한다. 하연은 조선 전기의 학자로 정몽주의 가르침을 받았다. 21세에 과거에 급제하였으며 여러 벼슬을 거쳐 영의정까지 올랐다.
문충사는 대전 동구 동부에 위치한 사당이다. 이곳은 구한말에 일제에 항거한 유학자이자 우국지사인 송병선, 송병순 형제의 위패와 영정을 모신 사당이다. 기존에는 1908년 충북 영동군에 건립되었는데, 송병선의 순국 60주년 기념사업 과정에서 1966년에 그의 순국지인 현 위치로 이전하였다.
문수암은 대한불교 조계종 제5교구 본사인 법주사의 말사이다. 공주 동학사의 강주를 역임했던 경봉(1885∼1969) 스님이 1930년 무렵 옛 절터에 창건했다고 한다. 문수산은 지금의 옥천군 청성면 마장리와 대안리 사이에 있는 산으로 조선 중기까지만 해도 이 산에 문수사라는 절이 있었던 것이 분명하지만 지금의 문수암이 자리 잡고 있는 곳이 옛 문수사의 터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문수암은 진천의 미륵산 중턱에 구불구불 이어진 길 끝에 자리하고 있다. 대웅전과 산신각, 요사체로 이루어진 조그마한 사찰이다. 근처에 천안과 진천을 오가는 국도가 조성되어 있어 쉽게 만성사에 갈 수 있다. 문수암은 충청북도 진천군 진천읍 미륵산에 자락에 자리 잡은 대한불교조계종 6 교구 마곡의 말사이다. 새로 세울 당시 이름은 만성사였으나, 1992년에 조계종으로 종파가 바뀌면서 사찰명이 문수암으로 바뀌었다.

경기도 용인시 원삼면 문촌리 문수산[文殊山] 정상 가까운 암벽면에 조각한 고려 전기의 마애불이다. 이곳에서 약 50m 떨어진 곳에는 암자터로 추정되는 곳이 있다. 암벽은 두 개로, 각각의 바위에는 연화대좌 위에 서 있는 보살상 두 구를 대칭되는 모습으로 새겼다. 현재로서는 중앙에 본존불 없이 보살상만을 조성하였기 때문에 어떤 식으로든 중앙에 원래 주존이 있었는지 혹은 본존불 조성에까지 이르지 못했던 것인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대한불교조계종 쌍계사의 말사인 문수암은 고성군상리면 무선리 무이산에 있는 암자로서 신라 의상조사가 창건했다. 창건 이후 이 암자는 수도 도량으로서 많은 고승들을 배출하였고, 산명이 수려하여 삼국시대부터 해동의 명승지로 유명하였으며 특히 화랑도 전성시대에 국선 화랑들이 이 산에서 심신을 연마하였다고 전해진다.

문수사는 백제무왕 25년(서기 623년) 혜덕왕사가 문수보살의 현몽으로 문수골에 창건하고 사찰 이름을 문수암이라 칭하였다. 그 후 서기 950년에 화재로 건물 등은 소멸되고 문수암 현판만이 현재 사찰의 부지인 장소에 날아와 떨어졌다고 한다. 현 소재지에 건립하라는 지시 인가 하여 서기 957년 고려 광종 8년에 혜림왕사가 현 장소에 중창하였다. 전 문수골과 현재 장소의 거리는 350m이고, 날아온 현판은 현재 보존하고 있으며 필적은 신필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