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흥 무열사
임진왜란과 정묘호란에 전공을 세운 진무성 장군을 추모하기 위해 호남 유림의 발의와 영남 유림의 협찬으로 고종 19년(1882) 이전에 있던 용강사를 계승하여 건립한 것이다. 진무성은 이순신이 지휘했던 당포해전, 옥포해전 등의 여러 전투와 제2차 진주성 전투에 참전하였다. 임진왜란 때의 전공으로 선무원종공신에 책봉되었으며, 난이 끝난 후 선조 32년(1599)에 무과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지역과 취향으로 찾기
지역과 관심 분야를 선택해 나에게 맞는 장소를 찾아보세요.
97건

임진왜란과 정묘호란에 전공을 세운 진무성 장군을 추모하기 위해 호남 유림의 발의와 영남 유림의 협찬으로 고종 19년(1882) 이전에 있던 용강사를 계승하여 건립한 것이다. 진무성은 이순신이 지휘했던 당포해전, 옥포해전 등의 여러 전투와 제2차 진주성 전투에 참전하였다. 임진왜란 때의 전공으로 선무원종공신에 책봉되었으며, 난이 끝난 후 선조 32년(1599)에 무과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고산사는 장평면에서 남쪽으로 2km 정도 떨어진 용두산 협곡에 위치한 자그마한 사찰로 인근에는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마을은 없다. 고산사에는 전남광주통합특별시 유형문화재인 고산사 석조여래입상이 볼만하다. 경내에는 약사보전과 요사채가 있고 약사보전 안에는 고려초기 석불인 약사여래 석불이 있다. 원래는 절터만 남아 있고 석불입상은 파손된 채 땅속에 묻혀 있었는데, 1966년 새로 지은 법당 안에 모셔놓았다.
고산서원은 퇴계와 더불어 조선 성리학의 6대가 중 1인으로 추앙받는 노사 기정진이 고종 15년(1878)에 정사를 지어 담대헌이라 하고 학문을 강론하던 곳이다. 후손들이 1924년 중건하였으며, 1927년에 고산서원이라는 편액을 걸었다. 노사 기정진은 19세기 전라도 지역뿐만 아니라 멀리 제주까지 전국적인 후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겸천서원은 전남광주통합특별시 순천시 주암면 죽림리에 있는 조선 후기의 서원이다. 조유(趙瑜)·조숭문(趙崇文)·조철산((趙哲山) 등 옥천조씨 3세를 배향했다. 순천을 관향으로 하는 단종의 충신인 김종서(金宗瑞)·박중림(朴仲林)·박팽년(朴彭年)도 함께 배향되었다. 겸천서원은 외삼문, 강당, 내삼문, 사당이 일직선상으로 배치되었고, 주위에 고직사, 유사방 건물이 있다.

조선중기 처사 이담로(聃老, 1627~1701)가 들어와 계곡 옆 바위에 ‘백운동(白雲洞)’이라 새기고 조영(造營)한 원림으로, 자연과 인공이 적절히 배합된 배치와 짜임새 있는 구성을 이루며 우리 전통 원림의 원형이 그대로 보존된 별서이다. 백운동이란 ‘월출산에서 흘러 내린 물이 다시 안개가 되어 구름으로 올라가는 마을’이라는 뜻으로 약사암과 백운암이 있었던 곳으로 전해진다.
강덕사는 강덕서원이라고도 한다. 조선 헌종 12년(1846)에 후손들의 협력으로 시조 장경공 최사전을 비롯하여 최표, 최부, 최극충을 배향하고 있다. 최사전은 어려서부터 무술에 정통하여 여러 대에 걸쳐 임금을 섬기던 중 고려 인종 때 이자겸의 난을 평정하여 나라를 보존시켜 강진의 명예를 드높인 인물이다.
가산서원은 고려 후기 문신 익재 이제현(1287∼1367)과 이제현의 8대손인 조선 중기 문신이자 학자 백사 이항복(1556~1618) 등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연산군 4년(1498) 이제현의 5대손인 장수 현감 이재인(1415~? )이 현 전남광주통합특별시 장성군 삼계면 주산리 백산촌에 집을 짓고 은거하면서 익재의 영정을 모셨고, 1559년 후손 이대정이 사우 백산사를 지어 익재의 제사를 모셨다.
강진향교의 확실한 창건연대는 알 수 없으나, 윤탁이 대성전에 은행나무를 심도록 권장하였다는 기록과 현재의 은행나무 나이를 짐작하여 조선 전기인 1400년대로 추정된다. 강진향교 역시 다른 건물과 같이 임진왜란의 병화를 입었으며, 광해군 5년(1613)에 이 지역출신 입방자들이 의금을 내고 군수 정인의 도움을 받아 사마재를 건립하였고, 그 후 1675년에 본격적으로 향교를 건립하였다.

증보문헌비고에 의하면 마도진 만호성은 石城으로 둘레가 890자(尺), 높이가 12 자라고 기록되어 있으나 현재는 서북벽의 일부만이 남아 있다. 성벽의 총 연장 길이는 730m 정도이고, 방형 및 장방형의 대형 석재로 기단부를 구축하고 상부로 올라갈수록 30×20㎝ 정도의 작은 석재를 이용하여 내탁법(內託法)에 의해 쌓아 올렸으며, 현존 서북벽은 길이 220m, 높이 2. 3∼4. 7m, 상부폭 1m, 하부폭 2. 5m이다.

강진 병영 마을은 옛 병마절도사의 영(營)이란 명칭에서 유래된 마을로 오랜 역사 속에서 그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주위의 수인산, 성자산, 옥녀봉, 별락산, 화방산 등 크고 작은 산으로 둘러싸여 분지 형태의 천연 요새로, 일찍이 전라도의 군수권을 통괄했던 병영성이 이곳에 들어섰으며 빠른 상업의 발달을 이룬 곳이다. 이곳에는 사적으로 지정된 ‘병영 성지’가 남아있어 그 역사를 증언하고 있다.

고려 인종 때 어의이면서 명신인 장경공 최사전을 중심으로 그의 후손 4명을 모시고 있는 서원으로 1927년에 전국 유림의 호응을 얻어서 세운 서원이다. 서원의 이름은 광주의 옛 지명에서 따 왔다.

서산사[西山寺]가 언제 창건되었는지는 기록이 없어 알 수 없고, 고려 후기인 1375년(우왕 1)에 내월리 선왕산 뒤편에 처음 세워졌었다는 구전이 전해질 따름이다. 이 외의 사적에 대해서는 명확히 알려진 바가 없으며, 주지의 설명에 의하면 조선시대 억불정책으로 위축되었던 포교활동을 1898년 목포 개항과 함께 다시 시작하려 하였으나 산길이 너무 험해 1920년에 현재의 위치로 옮기게 되었다고 한다.

비금도 내촌마을은 약 400년 전 형성된 마을로 바닷바람과 액을 막는 우실, 마을의 수호신인 석장승, 섬마을의 정서를 드러내는 돌담 등 섬마을 전통문화가 잘 보존되어 있는 곳이다. 섬마을은 바다로부터 불어오는 바람(서북풍)을 피하기 위해 집집마다 돌을 쌓아 돌담을 만들었다. 내촌마을의 담은 대부분 돌담으로 형성되어 있는데, 돌의 형태가 둥글지 않고 전반적으로 길쭉하면서 날카롭다. 담의 높이는 1. 5m 내외이며, 폭은 40~60㎝이다.

봉강사는 오룡리 오륜동 마을에 있다. 원래 고려시대 수조 12년(1812) 경, 서해도 안렴사를 지낸 송와 나문규와 죽헌 나계종을 춘추로 모시기 위해 금성 나 씨 문중에서 건립한 것이다. 대원군의 서원 훼철령 때 헐렸다가 1924년에 다시 복원하였다. 경내에는 사당인 봉강사와 강당인 영수재등 2동의 건물로 구성되어 있다. 사당인 봉강사의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으로 1812년에 처음 건립되었다고 하며, 1924년에 중건하였다.

보산정사는 조선 중종 때부터 선조 대 사이에 이 마을에서 태어나 문과에 급제한 8분의 선비를 추모하기 위하여 세워진 사당과 초동팔문관이 학문을 연마하고 후진을 양성한 장소인 보산정사와 동재, 서재, 고직사로 구성되어 있다. 초동은 나주의 대표적인 마을로 초동 8현으로 일컫는 문과 합격자를 잇따라 배출한 곳으로 초동팔문관은 이들 8명을 말한다. 보산정사는 사당보다 크고 오래된 누각 건물로 강당 형식을 하고 있어 그 예가 희귀하다.

대한불교조계종 제18교구 본사인 백양사(白羊寺)의 말사이다. 백제 성왕 22년(544) 연기조사가 창건하여 창룡사(蒼龍寺)라 칭했다고 전해지지만 문헌상의 기록이 없어 확인할 수 없으며, 창건 이후의 연혁에 대해서도 알려진 바 없다. 한국전쟁 후 거의 폐사되어 인법당의 형태로 유지되다가 이후 미륵당이라 불리면서 무속인이 거주하였다. 1990년대 후반 원일스님이 부임한 후 불사를 벌여 대웅전, 삼성각, 관음전, 설법전, 요사 등을 조성하여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다.

전남광주통합특별시 함평군에 위치한 모평(상모)마을은 역사와 전통, 그리고 생생한 자연을 체험할 수 있는 아주 특별한 농촌마을이다. 예쁜 돌담길로 시작되는 모평마을은 함평군의 뿌리가 되는 마을이다. 마을전체가 고풍스런 전통한옥으로 조성되어 있으며 27종의 역사문화 자원을 간직하고 있다. 마을 주변의 해보천(海保川)을 따라 늘어선 마을숲은 500여 년 전에 조성된 천연보호림으로 느티나무와 팽나무, 왕버들나무가 40여 그루 모여있는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다.

나주 순교성지는 기해박해(1839) 때 나주에서 순교한 이춘화(1807~1839베드로)와 병인박해(1866~1871)때인 1872년에 순교한 강영원(바오로,1822~1872), 유치성(안드레아, 1825~1872), 유문보(바오로, 1822~1871) 등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순교자 기념 경당이 자리한 곳이다. 경당 입구에는 60톤의 거석과 관 모양의 제대가 있고 경당 내부는 사방이 막혀있고 위쪽만 뚫려 있다.

이 건물은 나주목의 객사 건물로 매월 1일과 15일에 국왕에 대한 예를 올리고 외국 사신이나 정부 고관의 행차가 있을 때 연회를 열었던 곳이다. 초창은 성종 6~10년(1475~1479) 사이에 나주목사로 재직한 이 유인에 의해 건립되었으며, 여러 차례 중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정면 5칸, 측면 4칸, 팔각지붕의 320. 66m²(97평) 건물로 전국의 객사 건물 중 그 규모가 가장 웅장하다.

인근의 뛰어난 인재들을 모아서 힘껏 가르치거라 하는 중종의 하명을 받아 심광형은 일종의 영재학교를 세운다. 동악산을 등지고 섬진강과 마주하는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지형인 군촌마을에 함허정과 군지촌정사(제호정 고택)를 세웠다. 1535년에 지어진 군지촌정사는 조선 후기의 건물로 사랑채의 이름으로, 지금 남아 있는 사랑채와 고택 제월당은 1800년대에 지어진 건물로서, 군지촌정사의 원형은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김남주는 한국 민족문학을 대표하는 사람으로 사회변혁운동의 이념과 정신을 온몸으로 밀고나간 ‘전사(戰士)시인’이며, 혁명적 목소리로 한국문단을 일깨운 ‘민족시인’이다. 또한 청춘의 10년을 감옥에서 보내는 등 반독재 투쟁에 앞장선 혁명 시인이었다. 대학 재학중 ‘3선개헌반대투쟁’에 참여하는 등 반독재 학생운동에 투신한 그는 1972년과 이듬해에 전국 최초의 반유신투쟁 지하신문 ‘함성’과 ‘고발’을 제작.

금강사는 이순신 장군을 추향하고, 강진 출신 증병조판서 김억추 장군을 배향한 사우다. 사우 뒤편으로는 송림이 우거져 있는 등 비교적 경관이 양호하다. 1800년(정조 24년) 도내 유림들의 발의로 강진현 금강촌에 금강사를 창건하고 임진왜란 때 공이 많은 충무공 이순신(1545∼1598)과 현무공 김억추(1548∼1618) 장군을 향사하였다.

구암사는 고려시대에 번창하여 여귀산 자락에 여러 암자가 있었는데, 이는 중방골이나 불당골 등 불교와 관련 있는 여러 암자로부터 유래된 산의 명칭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 사찰에 있는 오층석탑은 백제 후기나 고려 초기에 지어진 탑으로 보고 있으며, 해체 보수 때 사리를 넣었던 흠이 발견된 것으로 보아, 대웅전의 실내탑으로 추정하고 있다.
경현서원은 나주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조선 유학을 대변하는 많은 인물을 배향한 곳으로 나주 최초의 사액서원이다. 이곳은 16~17세기 나주지역의 을미옥사의 발생 원인과 전개 과정을 보여주는 중요한 유적으로 1583년(선조 16) 지방 유림이 김굉필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금성산 아래에 사당을 창건하여 위패를 모시고 1589년(선조 22)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 4위를 함께 배향하여 오현서원이 되었다.

화순 개천사는 통일신라 헌덕왕 말기(809-825년) 도의선사가 창건했다는 설과 통일 신라 말 도선국사가 창건했다는 설이 있다. 하지만 모두 후대의 기록이라 확인하기 어렵다. 조선시대 정유재란 때 불에 타 소실되었다가 복구되었으며 일제강점기에는 용화사로 불렸다. 천불전이 있었는데 1950년 한국전쟁으로 소실되었다가 1963년에 주지 김태봉이 주민들의 협조로 대웅전과 요사를 중건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