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만동묘정비
묘정비는 서원 앞에 세워 서원의 건립취지와 그 서원에 모시는 인물을 찬양하는 내용을 기록해 놓은 비석이다. 이 비는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를 도와준 중국 명나라의 임금인 신종과 의종의 제사를 지내는 만동묘 사당에 자리 잡고 있다. 만동묘는 우암 송시열의 가르침에 따라 그의 제자 수암 권상하가 명나라 의종이 죽은 지 60년이 지난 숙종 30년(1704)에 지은 것이다.
지역과 취향으로 찾기
지역과 관심 분야를 선택해 나에게 맞는 장소를 찾아보세요.
914건

묘정비는 서원 앞에 세워 서원의 건립취지와 그 서원에 모시는 인물을 찬양하는 내용을 기록해 놓은 비석이다. 이 비는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를 도와준 중국 명나라의 임금인 신종과 의종의 제사를 지내는 만동묘 사당에 자리 잡고 있다. 만동묘는 우암 송시열의 가르침에 따라 그의 제자 수암 권상하가 명나라 의종이 죽은 지 60년이 지난 숙종 30년(1704)에 지은 것이다.

두동교회 구본당은 1929년에 건립한 두동교회의 초기 본당이다. 두동교회는 1923년에 마을 부호 박재신의 사랑채에 예배소가 들어서면서 시작되었다. 이후 1929년에 교인들이 현재의 자리에 ㄱ자형 한옥식 교회를 지었다. 익산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 건물로 1964년 현 예배당이 건립될 때까지 본당으로 사용되었고, 지금은 두동교회의 역사를 보여주는 사진 자료를 전시해 놓았다.

동고산성은 통일신라시대에 쌓은 산성으로 조선 순조 때 건너편 산성을 ‘남고산성’이라 부르면서 붙여진 이름이다. 둘레는 1,712m이며, 동서방향으로 314m, 남북방향으로 256m에 이르는 비교적 대규모의 산성이다. 성벽은 포곡식 산성 방식으로 만들어졌으며, 예로부터 후백제를 세운 견훤왕이 도읍으로 삼았던 완산주의 궁성으로 추정되고 있다.

대원사 용각부도는 완주 모악산(795m) 동쪽 자락에 위치한 사찰 대원사 경내에 보존된 부도 중 하나이다. 부도는 불교에서 승려의 사리를 안치한 탑이다. 대원사에는 총 10기의 부도가 있는데 그 중 북동쪽에 4기, 계곡에 6기가 있다. 용각부도는 그 중 북동쪽에 위치한 4기의 부도 중 하나로 고려시대에 세워진 것이다. 이 부도는 종 모양의 부도로 자연석을 다듬어 만들었으며, 구름 문양, 용 문양, 연화 문양을 새겼다.

남원의 서쪽 교룡산 자락에 자리한 대복사는 신라시대에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창건한 사찰이라 전한다. 도선국사는 남원의 지세가 재물을 가득 실은 배(船)의 형국이고, 교룡산이 배를 덮치는 험한 파도로 보았다. 이에 주산인 백공산의 약한 기운을 북돋우기 위해 선원사(禪院寺)를 창건하고, 객산인 교룡산의 강한 기운을 누르기 위해 대복사의 전신인 대곡암(大谷庵)을 창건한 것이다. 따라서 풍수적으로 볼 때 대복사는 파도를 막는 방파제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달성태고정은 조선 성종 10년(1479) 박팽년의 손자인 박일산이 세운 별당건축이다. 지금 있는 건물은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 때 불타서 일부만 남았던 것을 광해군 6년(1614)에 다시 지은 것이다. 항상 바르고 올곧게 살자는 뜻에서 일시루라고도 한다.

노성향교는 조선 전기에 창건된 향교이다. 그 후 1967년과 1975년 두 차례에 걸쳐 중수되었다. 대성전, 명륜당, 동재, 서재, 삼문, 대성전이 등이 현존하며, 대성전에는 중국과 조선의 유학자 18현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봄 ·가을에 석전제를 거행한다. 노성향교는 앞에는 네모난 형태의 조그마한 연못이 있으며 외삼문 앞의 배롱나무꽃이 아름답다.

내원사는 삼각산 자락에 자리하고 있는 사찰로, 정릉 골짜기를 지나 1㎞ 정도 오르면 멀리 목멱산을 바라보는 곳에 자리하고 있다. 언제 누가 창건했는지는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지만 터전이 예사롭지 않음을 느낄 수 있다. 역사적으로 내원사의 존재를 밝혀주는 것은 현재로서는 김정호가 제작한 「수선전도(首善全圖)」와 1859년(철종 10) 만들어져 사찰에 전하는「백의대사불도(白衣大士佛圖)」라는 목판이 유일하다.

봉수(俸燧)는 높은 산에 올라가서 밤에는 횃불[俸]로, 낮에는 연기[燧]로 급한 소식을 전하던 전통시대의 통신 제도이다. 이 제도는 처음에 외적의 침입을 알리는 군사적 목적에서 실시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기록상 고려 중기(12,3세기)에 이 제도가 나타나지만, 실제로는 삼국시대 이전부터 실시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봉수제가 체계적으로 정비된 때는 왜구의 침입이 극심했던 고려 말기와 조선 초기 이후였다.

우리나라 사찰은 대체로 산속에 위치해 있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남원사는 보기 드문 평지 사찰이다. 벼 이삭이 익어가는 8월이 어느 날. 장마 뒤끝에 눈부시게 푸른 하늘을 시샘하듯 들녘을 가득 메운 벼들은 빗물에 씻긴 채 물기를 머금고 초록빛이 더욱 짙어져 간다. 시원하게 뚫린 서해안고속도로를 달려 울창한 나무와 숲을 가로질러 난 고불고불한 산길을 지나 노인분들께 물어물어 남원사를 찾아간다.

장승은 민간신앙의 한 형태로 마을이나 사찰 입구에 세워져 경계를 표시함과 동시에 잡귀의 출입을 막는 수호신의 구실을 한다. 남원 실상사 석장승은 실상사를 지키는 돌장승으로, 원래는 냇가에 모두 4개가 있었다. 그러나 1936년 홍수 때 1개가 쓸려 내려가 현재는 3개만 남았다. 남아있는 3개의 장승은 각각 ‘대장군’, ‘옹호금사축귀장군’, ‘상원주장군’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다.

남원시 아영면 성리 마을은 판소리 다섯 마당 중의 하나인 흥부전의 배경이다. 이곳은 전해내려오는 설화와 지명을 근거로, 흥부가 정착하여 부자가 된 발복지(發福地)로 밝혀졌다. 이 마을에는 오래전부터 복덕가(福德家) 춘보 설화(春甫說話)가 전해져 오고 있다. 흥부가와 춘보 설화는 가난 끝에 부자가 된 인생역정, 선덕의 베풂을 내용으로 한다는 점에서 그 내용이 유사하다. 실제로 성리 마을에는 박춘보(朴春甫)의 묘로 추정되는 무덤이 있다.

신계리 마애여래좌상은 풍악산 동쪽 중턱에 우뚝 솟은 바위의 남면에 새겨진 불상으로 자연 암석의 한 면을 다듬어 거기에 부처의 앉은 모습을 돋을새김 한 마애불이다. 고려 초 도선스님이 하룻밤 만에 만들었다는 전설이 있다. 줄에 꿴 구슬로 둥글게 감싸 몸 둘레에 서린 빛을 표현한 것은 희귀한 예이다. 왼쪽 어깨에 걸친 옷은 단순한 선으로 간략하게 처리하였다. 얼굴은 둥글고 풍만하며 이목구비를 비교적 생동감 있게 조각하였다.

남궁찬묘석상은 조선 전기의 문신인 남궁찬묘 앞에 자리하고 있는 2기의 석상이다. 석상의 재질은 화강암이며 오른쪽 석상의 높이는 260㎝, 왼쪽 석상은 250㎝이다. 각진 큰 머리에 구슬 모양 장식을 붙인 모자를 쓰고 있으며 툭 튀어나온 눈과 두툼한 코와 내밀고 있는 턱이 특징이다. 옷은 도포를 걸친 모습으로 선을 가늘게 조각하였으며 양손은 소맷자락 속에 넣고 있다.

남계정은 조선 중기의 학자 김진이 후학을 양성할 목적으로 세운 누각이다. 기록에 의하면 이 건물은 선조 13년(1580)에 신축해 두 차례 중건되었다. 정자는 낮은 기단 위에 세운 정면 3칸, 측면 2칸의 대청마루와 방으로 이루어져 있는 목조 건물이다. 지붕은 팔작지붕이고 공포는 주심포 양식이다. 구성은 대청마루와 방으로 나뉘어 마루에는 ㄱ자형으로 정면과 측면에 걸쳐 퇴를 두었다.

나주 순교성지는 기해박해(1839) 때 나주에서 순교한 이춘화(1807~1839베드로)와 병인박해(1866~1871)때인 1872년에 순교한 강영원(바오로,1822~1872), 유치성(안드레아, 1825~1872), 유문보(바오로, 1822~1871) 등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순교자 기념 경당이 자리한 곳이다. 경당 입구에는 60톤의 거석과 관 모양의 제대가 있고 경당 내부는 사방이 막혀있고 위쪽만 뚫려 있다.

나바위 성당은 조선 헌종 11년(1845년) 김대건 신부가 중국에서 사제서품을 받고 페레올 주교 다불뤼 신부와 함께 황산 나루터에 상륙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건립하였다. 초대주임이었던 베르모넬(장약슬, 요셉) 신부가 중심으로 1906년 건물을 시공하여 1907년 완공하였다. 성당설계는 명동성당 포아넬 신부가 도왔고 공사는 중국인들이 맡았다.

이 건물은 나주목의 객사 건물로 매월 1일과 15일에 국왕에 대한 예를 올리고 외국 사신이나 정부 고관의 행차가 있을 때 연회를 열었던 곳이다. 초창은 성종 6~10년(1475~1479) 사이에 나주목사로 재직한 이 유인에 의해 건립되었으며, 여러 차례 중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정면 5칸, 측면 4칸, 팔각지붕의 320. 66m²(97평) 건물로 전국의 객사 건물 중 그 규모가 가장 웅장하다.

금정사는 경상남도 하동군 금남면 대송리에 있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15교구 통도사 하동분원의 사찰이다. 1948년에 정우경이 경상남도 하동군 금남면 대송리 15번지에 설립하였으며, 당시에는 금강사(金剛寺)라고 하였다. 6·25 전쟁을 겪고 난 뒤에 정우경이 이 사찰을 떠나자 여러 승려들이 주석하였지만 오래 머물지 못하고 주지 없이 20년을 지냈다.

인근의 뛰어난 인재들을 모아서 힘껏 가르치거라 하는 중종의 하명을 받아 심광형은 일종의 영재학교를 세운다. 동악산을 등지고 섬진강과 마주하는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지형인 군촌마을에 함허정과 군지촌정사(제호정 고택)를 세웠다. 1535년에 지어진 군지촌정사는 조선 후기의 건물로 사랑채의 이름으로, 지금 남아 있는 사랑채와 고택 제월당은 1800년대에 지어진 건물로서, 군지촌정사의 원형은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본래 1580년(선조 13) 김안국의 위패를 모시기 위해 마암에 마암서원으로 세워졌다가 임진왜란 때 소실되자 1608년(선조 41) 현재 위치로 이전해 복원하였다. 이후 조선 중종대부터 효종대까지 이름난 현인인 이언적·홍인우·이원익·정엽·이식·홍명구·홍명하까지 총 8명을 함께 배향하였다. 1625년(인조 3)에 기천서원으로 임금으로부터 사액을 받아 사액서원으로 승격되었으나, 1871년(고종 8)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사라지게 되었다.

김남주는 한국 민족문학을 대표하는 사람으로 사회변혁운동의 이념과 정신을 온몸으로 밀고나간 ‘전사(戰士)시인’이며, 혁명적 목소리로 한국문단을 일깨운 ‘민족시인’이다. 또한 청춘의 10년을 감옥에서 보내는 등 반독재 투쟁에 앞장선 혁명 시인이었다. 대학 재학중 ‘3선개헌반대투쟁’에 참여하는 등 반독재 학생운동에 투신한 그는 1972년과 이듬해에 전국 최초의 반유신투쟁 지하신문 ‘함성’과 ‘고발’을 제작.

금강사는 이순신 장군을 추향하고, 강진 출신 증병조판서 김억추 장군을 배향한 사우다. 사우 뒤편으로는 송림이 우거져 있는 등 비교적 경관이 양호하다. 1800년(정조 24년) 도내 유림들의 발의로 강진현 금강촌에 금강사를 창건하고 임진왜란 때 공이 많은 충무공 이순신(1545∼1598)과 현무공 김억추(1548∼1618) 장군을 향사하였다.

귀래정은 전북특별자치도 순창군에 있는 정자이다. 귀래정이란 이름은 신말주의 호를 딴 것이다. 현재 정자에는 귀래정기와 강희맹의 시문 등이 편액에 새겨져 있다. 귀래정은 1457년(세조 2년)에 신말주에 의해 세워졌다고 하는데 현재의 건물은 1974년에 다시 세운 것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다. 주변 관광지로 강천산군립공원, 국립회문산자연휴양림, 설씨부인신경준선생유지 등이 있다.

조선 개국공신 김사형의 후손으로 학자이며 예술가인 보정 김정회(1903∼1970)의 생가로 김정회의 고조 때부터 살던 곳이다. 고가가 위치한 도산마을은 안동김씨와 청도김씨의 세거지로서, 다른 곳에 비해 고가가 많이 남아 있는데, 김정회고가는 그중에서도 가장 오래된 고가이다. 현재 안채와 사랑채, 문간채, 사랑채, 사당, 곳간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앞면 6칸·옆면 3칸의 안채는 지붕 옆면이 여덟 팔자 모양인 팔작지붕집이며, 후대에 양쪽에 각각 1칸씩 덧붙였다.

경남 남해군 이동면 신전리에 위치한 금왕사는 기암절벽 가까이 이런 사찰을 지었다는 게 놀라울 정도로 빼어난 풍경을 자랑한다. 또한, 일 년 내내 끊일 줄 모르고 나온다는 천년의 약수도 있다. 천년의 약수 위로 오르면 돌로 만들어진 동자승이 누워 있고, 금왕사 미륵전에서 참배가 가능하다.

김시민장군 충민사는 임진왜란 때 전공을 세운 충무공 김시민과 문숙공 김제갑의 위패를 봉안하고 제향하는 사당이다. 김시민(1554~1592)의 자는 면오, 본관은 안동으로 선조 11년(1578) 무과에 급제하고 선조 24년(1591) 진주판관이 되었다.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진주목사로 사천, 고성, 진해에서 적을 격파하고 영남우도병마절도사에 올랐다. 그 후 진주성 싸움에서 3,800여 명의 군사와 백성으로 2만여 명의 일본군을 물리쳤다.

회현리 패총에서는 김해식 토기와 각종 철기, 골각기 등과 함께 중국의 화천이라는 동전이 출토되어 당시의 교역 상황을 나타내 주고 있으며, 우리나라 최초로 불에 탄 쌀이 출토되어 쌀농사의 기원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되었다. 봉황대는 조선시대 김해 부사를 지낸 정현석이 언덕의 모양이 봉황의 날개를 편 모습과 같다 하여 대를 쌓고 봉황대라 부른 것에서 유래되었다.

금산면 청도리에 있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7교구 본사 금산사의 말사이다. 귀신사는 676년(문무왕 16)에 의상대사가 세운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백제 법왕 때 왕실의 내원사로 처음 세워졌다는 주장도 있다. 창건 당시의 명칭은 국신사였다고 한다. 그 후 통일신라 말기 도윤이 중창한 뒤 귀신사로 개칭하였다. 고려시대에는 원명국사(1090~11410가 중창하였는데 이 무렵에는 구순사로 불렸다.

금강사는 소금강 무릉계곡에 정각 스님이 1964년 창건한 절로서 기암괴석이 아름답고, 시냇물이 맑은 주변의 경관으로 인해 이 일대를 찾는 관광객들에게 필수 코스로 자리 잡은 절이다. 특히 금강사의 맞은편에는 천여 명의 군사가 앉아서 점심을 먹었다는 전설이 깃든 식당암이 있고, 봉우리 3개가 기이하게 솟아있는 삼선봉을 만나볼 수 있어 소금강 탐방로를 찾는 관광객들이 꼭 머무는 곳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

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만취당 권율(1537~1599) 장군의 묘소이다. 선조 15년(1582) 과거에 급제한 후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으며, 55세 때에는 의주목사로 부임하여 북방 여진족을 방어하였다. 묘역에는 장군의 묘를 중심으로 좌우에 전부인 창녕조씨와 후부인 죽산박씨가 안장되어 있으며, 묘 앞에는 묘비와 상석, 향로석, 동자석 1쌍이 있고 좌우에 망주석과 문인석 1쌍이 있다. 권율 장군 묘 뒤쪽 언덕에는 형 권순과 아버지인 권철의 묘가 차례로 모셔져 있다.

구암사는 고려시대에 번창하여 여귀산 자락에 여러 암자가 있었는데, 이는 중방골이나 불당골 등 불교와 관련 있는 여러 암자로부터 유래된 산의 명칭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 사찰에 있는 오층석탑은 백제 후기나 고려 초기에 지어진 탑으로 보고 있으며, 해체 보수 때 사리를 넣었던 흠이 발견된 것으로 보아, 대웅전의 실내탑으로 추정하고 있다.

구암정은 순창 구미마을과 내월교 사이 섬진강 및 국도 21호선, 섬진강자전거길가에 세워진 정자이다. 이 정자는 돈암 혹은 배암이라 불리는 바위 위에 서 있다. 이 바위는 인근 남원 출신의 조선 전기 학자 구암 양배(? ~1500)가 그의 동생 양돈과 함께 낚시를 하며 시간을 보내던 곳이다.

강원도 정선 봉산리에 있는 구미정은 조선 숙종 때 공조 참의를 역임한 수고당 이자선생이 관직을 사직하고 정선에 내려와 은거 생활 중 지은 정자이다. 남한강 상류인 골지천의 넓은 암석 위에 세워진 정자로, 이 정자를 중심으로 주위에 아홉 가지 뛰어난 자연경관을 한눈에 볼 수 있다고 해서 이런 이름을 붙었다. 정자 주변으로는 소나무 숲과 야영장이 있어 여름에 피서지로도 인기가 많다. 구미정에서 바라볼 수 있는 아홉 가지 아름다운 경관은 다음과 같다.

서원은 조선 중기 이후에 학문을 연구하고 훌륭한 유학자의 제사를 지내기 위하여 지역 사림에 의해 설립된 사설 교육 기관이다. 매봉 밑자락에 있는 관곡서원은 1820년(순조 20)에 지방 유림들이 최윤덕, 이형남, 이적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였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되었다가 1958년 후손에 의해 복원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경내의 건물로는 3칸의 사우가 있다. 매년 3월 중정과 9월 중정에 향사를 지내고 있다.

괴산 김항묵 고택은 1900년 전후에 지어졌다고(안채는 19세기 초) 추정되는 건물로 공간구성의 아름다움, 외벽 장식의 화려함, 건축 당시의 모든 구조물의 보존 등 전통적 상류주택의 정수를 보여준다. 괴산군 칠성면에 있어서 칠성고택으로도 불린다. 안채는 30여 평 규모의 ㄷ자형 평면으로 남도식 배치 방법을 띠고 있다. 대청을 중심으로 왼쪽에 안방, 부엌(찬방 포함)을 두었으며 오른쪽에 건넌방을 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