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리굴 문화마을
너리굴 문화마을은 비봉산 자락에 자리 잡고 있는 캠핑장과 펜션 및 다양한 문화공간까지 갖춘 산속의 마을이다. 너리굴아란 말은 넓은 골이라는 뜻의 안성 고유어이다. 너리굴 문화마을은 자연과 예술이 한데 어울려 있는 마을로, 강당 및 회의실과 펜션 숙소, 카라반, 운동장, 수영장, 카페, 아트숍 등이 갖추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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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리굴 문화마을은 비봉산 자락에 자리 잡고 있는 캠핑장과 펜션 및 다양한 문화공간까지 갖춘 산속의 마을이다. 너리굴아란 말은 넓은 골이라는 뜻의 안성 고유어이다. 너리굴 문화마을은 자연과 예술이 한데 어울려 있는 마을로, 강당 및 회의실과 펜션 숙소, 카라반, 운동장, 수영장, 카페, 아트숍 등이 갖추어져 있다.

임금이 서울의 궁궐을 떠나 도성 밖으로 행차하는 경우 임시로 거처하는 곳을 행궁이라 한다. 남한산성 행궁은 전쟁이나 내란 등 유사시 후방의 지원군이 도착할 때까지 한양 도성의 궁궐을 대신할 피난처로 사용하기 위하여 조선 인조 4년(1626)에 건립되었다. 실제로 인조 14년(1636) 병자호란이 발생하자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난하여 47일간 항전하였다. 이후에도 숙종, 영조, 정조, 철종, 고종 등이 여주, 이천 등의 능행길에 머물러 이용하였다.
남이장군 묘는 화성시 비봉면에서 2. 남이(1441∼1468)는 본관은 의령으로, 태종의 외손이며 좌의정 권람의 사위이다. 1457년(세조 3) 17세 때 무과에 급제하여 세조의 총애를 받았다. 이시애의 난(1467)이 일어나자 출전하여 용맹을 떨쳤고, 여진의 건주위를 정벌할 때에도 선봉으로 적을 무찔러 이름을 날렸고, 26세의 나이에 병조판서에 올랐다.
팔당역은 1939년 4월 1일 보통역으로 영업을 개시하였다. 우리나라에서 보기 드물게 플랫폼에 노선을 따라 설치되어 있는 일자형의 장방형 역사로서 희소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건축외형은 비교적 원형을 잘 간직하고 있으며 내부공간은 전면부를 대합실, 후반부를 사무실과 숙직실로 사용하고 있다. 또한, 내부공간은 다소 변형되었으나 주요 구조재는 그대로 유지되고 있어 당시의 철도역사건축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자료이다.
광릉은 조선 7대 세조(재위 1455~1468)와 정희왕후 윤씨(1418~1483)의 능이다. 같은 능역에 하나의 정자각을 두고 서로 다른 언덕에 능침을 조성한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의 형식으로 조선왕릉 중 최초로 조성된 형식이다. 정자각 앞에서 바라보았을 때 왼쪽 언덕(서쪽)이 세조, 오른쪽 언덕(동쪽)이 정희왕후의 능이다. 1468년(예종 즉위)에 세조가 세상을 떠나자 현재의 자리에 조성되었다.

금정사는 신라 진흥왕(540~576) 때 창건되었으며, 창건 당시에는 ‘고상사’라고만 전하여 왔으나 달리 전해오는 기록은 없다. 조선 인조 5년(1627)에 왕은 자신의 아버지 원종으로 추증하고 어머니 역시 인헌왕후로 추증하여 그들의 묘를 양주에서 김포로 이장하고 장릉이라고 하였다. 인근에 있던 고상사를 현재의 위치로 옮겨 장릉을 보호하는 사찰로 재건하면서 ‘봉릉사’라 칭하게 되었다.
중국 춘추 시대의 학자인 공자(孔子, B. C. 551년-B. C. 479년)의 후손이며, 조선 전기 문신인 공서린[孔瑞麟, 1483년-1541년]이 후학들을 가르치기 위해 세운 곳이다. 1792년에 이곳을 공자가 살던 노나라의 마을 이름을 따라 ‘궐리’로 바꾸었고, 사당을 세운 후 그 이름을 ‘궐리사’라고 했다. 이곳은 고종의 서원철폐[書院撤廢 ; 1871년 전국의 47개소 서원(사우 포함)만 남기고 모두 없앰]로 없어졌다가 1900년에 다시 세워졌다.

김포 수안산성은 경기도 김포시 대곶면 수안산 정상(147m)에 위치해 있다. 이곳은 김포의 서북부지역이며, 산 정상부에서는 인천, 강화, 서울지역이 넓게 조망된다. 수안산성의 평면 형태는 남북으로 긴 타원형이다. 현존하는 성벽의 둘레는 685m인데, 군사시설이 설치되면서 훼손이 심한 상태다. 성벽은 석축이며 방형이나 장방형으로 가공된 성돌을 바른층쌓기하여 정교하게 쌓아 올렸다.

김포 덕포진은 경기도 김포시 대곶면에 자리한 조선시대의 전략적 요충지로, 소규모 군사기지인 돈대와 포대, 파수청이 있었다. 돈대는 주변 관측이 용이하도록 높은 땅에 설치한 기지이다. 포대의 경우엔 아군의 포격에 편리하도록 구축된 축성물이며, 파수청은 탄약고와 포대에 사용하기 위한 불씨를 보관하고 포병을 지휘하던 곳이다.
![김포 장릉(원종·인헌왕후) [유네스코 세계유산]](https://tong.visitkorea.or.kr/cms/resource/50/3361650_image2_1.jpg)
장릉은 조선 16대 인조(1623~1649)의 생부인 원종과 그의 비 인헌왕후 구씨의 능이다. 장릉은 하나의 곡장 안에 봉분을 나란히 배치한 쌍릉[雙陵]의 형식으로, 앞에서 능을 바라보았을 때 왼쪽(서쪽)이 원종, 오른쪽(동쪽)이 인헌왕후의 능이다. 능의 규모와 규격은 조선 중기의 전형을 말해주고 있는 듯 하고, 능 아래는 제사를 지내는 재실이 있으며, 조선 21대 영조와 22대 정조가 매년 행차하여 제사를 모시던 건물이며, 능 주위는 공원처럼 꾸며져 있다.

김포향교는 1127년에 처음 지었다고 전해지나 확실하지 않다. 향교는 원래 김포 여자종합고등학교가 있는 산기슭에 있었으나 왕의 능을 그곳에 모시게 되면서 김포읍 걸포리로 옮겼다가 다시 지금의 위치로 옮겼다고 한다. 건물은 1960년대 이후 여러 차례 보수되어 오늘날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건물의 배치는 앞쪽에 교육 공간인 명륜당과 동·서재가 있고, 뒤쪽에 제사 공간인 대성전과 동·서무가 세워져 있다. 그 외에도 재실(齋室)과 출입구인 외삼문과 내삼문이 있다.

경기도 광주시 산성리에 위치한 국청사는 조선 왕조 제16대 인조 2년(1624) 벽암 각성대사에 의해 창건되었다. 각성대사는 인조로부터 팔도도총섭총절제중군주장(八道都摠攝總節制中軍主將)으로 임명을 받은 후 전국 팔도에서 의승군을 모아 남한산에 석성을 축성하였다. 이때 7개의 사찰을 창건하였는데, 그중 하나가 그중의 하나가 국청사이다. 국청사는 백성들과 의승군을 훈련하여 외적의 침입에 대비하고, 비밀리에 군기(軍器)와 화약·군량미 등을 비축하였던 사찰이다.
선사시대의 유적인 고인돌과 지압로등 체육시설, 벚나무길로 조성되어 있다. 동패동 교하중학교 인근 다율동과 당하동, 교하동이 인접한 구릉지대에는 100 여기가 넘는 고인돌이 무리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군사시설 조성과정에서 고인돌 대부분이 파괴되었고, 20 여기만이 남게 되었으며 그 가운데 상태가 양호한 6기가 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다율동에서 발굴된 고인돌은 이미 훼손된 상태였기 때문에 본래의 하부구조가 제대로 남아 있지 않지만, 탁자식으로 추정된다.

향교는 훌륭한 유학자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며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해 설립된 고려·조선시대의 국립 교육기관이다. 교하향교는 경기도 문화재로 지정된 파주시를 대표하는 조선시대 관립학교이다. 파주시에는 파주향교, 교하향교, 적성향교 총 3곳의 향교가 있는데 그중 하나이다. 교하향교는 본래 조선 초 1407년(태종 7년)에 탄현면 갈현리에 창건되었는데, 1731년(영조 7) 파주 장릉의 능기로 정해져 지금의 자리로 옮겨 세웠다.
과천향교는 1398년에 과천현에 설립되었다. 그 후 터가 좋지 않아 인재가 나지 않는다는 풍수설을 믿은 유림들에 의견을 따라 1690년 지금의 자리로 옮겨지었다. 앞쪽에 교육 공간인 명륜당을 배치하고, 뒤쪽에 제사 공간인 대성전을 두었다. 앞에는 학문하는 공간, 뒤에는 제사하는 공간을 두고 있다. 대성전은 앞면 3칸, 옆면 2칸 규모이며, 지붕은 옆에서 볼 때 사람 人(사람 인)자 모양의 맞배지붕이다.

1986년 중부고속도로를 건설하는 과정에 발굴된 곳으로 ‘번천리 5호 가마’로도 불린다. 조선 세조 13년인 1467년에 왕의 명으로 처음 만들어져 이후 약 500여 년을 이어져 내려온 한국의 백자 가마터이다. 이곳에서는 1400년대 중반부터 조선백자 중 가장 우수한 백자를 구워냈으며, 382,738㎡에 이르는 면적에 300여 개의 가마터가 남아있으며 이 가운데 68개소는 국가지정문화재 사적으로 지정, 관리되고 있다.

400년이 넘은 충남 광천의 사대부 한옥을 그대로 옮겨 복원시켰다. 1,000년 수령의 느티나무와 소나무들이 한옥과 어우러져 계절마다 새로운 옷을 갈아입는다. 수려한 자연 속에서 한옥의 고즈넉한 정취를 느끼며 삶의 여유를 느껴볼 수 있다. 남한산성의 산기슭 아래 한옥스테이와 카페가 위치하고 있어 다채로운 체험을 할 수 있다.

경앙사는 오진영 선생의 문인들이 조선 후기 대표적인 성리학자인 노주 오희상을 비롯해 간재 전우, 석농 오진영 선생의 학덕과 절개를 기리기 위해 위패를 봉안하고 제향을 올리는 사당이다. 매년 음력 3월 10일 제사를 지내고 있다. 건물은 총 26㎡(8평)로 겹처마 맞배지붕의 한옥이며, 홍살문, 삼문, 사당 등이 차례로 배치되어 있다.

강한사는 조선 중기 학자이며 정치가인 송시열(1607년-1689년)의 뜻을 기리기 위해 지은 사당이다. 송시열은 생전에 영의정까지 지낸 인물로 경기도 여주에 머물 때마다, 영릉(효종의 능)을 바라보며 효종의 북벌 정책에 대한 대의를 주장하였다고 한다. 이후에 정조가 영릉에 행차하다가, 이 이야기를 듣고 김양행에게 송시열의 사당을 짓게 하였고, 송시열을 높여 ‘대로’의 명칭을 붙여 사당을 ‘대로사’라 하였다.
효자 강영천은 진주 강씨로 3세 때 부친을 여의고 홀어머니 연일 정씨와 함께 살던 중 7세 때 모친이 병으로 몸 져 눕게 되었다. 나이는 비록 어렸으나 효심이 지극하였던 영천은 병든 어머니의 수발을 들던 중 병이 악화되어 정신을 잃자 자신의 손가락을 문지방에 깨트려 피를 내어 입에 흘려놓고 쓰러지고 말았다. 어머니가 깨어나 피를 흘리며 쓰러진 어린 아들을 발견하여 정성껏 간호한 끝에 깨어날 수 있었다.
별묘는 남도진(1674 현종 15∼1735 영조11)의 영정을 모신 사당으로 설악면 방일리 음방[陰坊]에 있다. 이사당에 모셔진 영정은 가로 120㎝, 세로 200㎝ 크기의 두루마리 표구로 제작되었는데 1728년(영조5년) 6월에 조선 숙종조 시절에 이름이 알렸던 화가 함세휘가 그린 것으로 인물에 대한 선의 감각이 원형대로 잘 보존 되어있다.

고려, 조선시대의 교육기관으로 유학을 가르치고 인재를 양성하던 곳

부용산 자락에 위치한 미륵암은 미륵불과 농부에 대한 재미있는 설화가 전해지는 사찰이다. 최초 창건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조선 세조 때 한 농부가 밭을 갈다가 미륵불을 얻었다고 한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세조는 국상 신숙주에게 절을 짓게 명하였고, 신숙주가 혜암대사를 후원하여 절을 짓고 미륵암이라 하였다. 이를 근거로 세조의 재위연간 중 1460년대를 이 절의 초창연대로 보고 있다.

본래 1580년(선조 13) 김안국의 위패를 모시기 위해 마암에 마암서원으로 세워졌다가 임진왜란 때 소실되자 1608년(선조 41) 현재 위치로 이전해 복원하였다. 이후 조선 중종대부터 효종대까지 이름난 현인인 이언적·홍인우·이원익·정엽·이식·홍명구·홍명하까지 총 8명을 함께 배향하였다. 1625년(인조 3)에 기천서원으로 임금으로부터 사액을 받아 사액서원으로 승격되었으나, 1871년(고종 8)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사라지게 되었다.

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만취당 권율(1537~1599) 장군의 묘소이다. 선조 15년(1582) 과거에 급제한 후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으며, 55세 때에는 의주목사로 부임하여 북방 여진족을 방어하였다. 묘역에는 장군의 묘를 중심으로 좌우에 전부인 창녕조씨와 후부인 죽산박씨가 안장되어 있으며, 묘 앞에는 묘비와 상석, 향로석, 동자석 1쌍이 있고 좌우에 망주석과 문인석 1쌍이 있다. 권율 장군 묘 뒤쪽 언덕에는 형 권순과 아버지인 권철의 묘가 차례로 모셔져 있다.

고송정지는 조선시대 순조 27년(1827)에 김처일이 그의 9대조인 김충주를 애도하여 지은 고송정이라는 정자가 있던 자리이다. 김충주는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단종 복위 운동에 참여했다가 죽임을 당하자 밤중에 도성을 도망하여 여러 곳을 돌아다니다가 화정동에 숨어 살면서 평생 고기와 술을 먹지 않고 베옷에 평민들이 쓰던 모자를 쓰고 다녔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