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 조선식산은행 원주지점
구 조선식산은행 원주지점은 일제강점기 일제의 경제적 침략에 큰 역할을 한 조선식산은행 원주지점으로, 원주 지역에서 맨 처음 건립된 은행이다. 조선식산은행은 1906년 6월부터 각 지방에서 설립된 6개 농공은행 권리와 의무를 계승한 은행으로서, 조선총독부가 조선에서 농업생산을 극대화하기 위해 일본인의 직접적인 투자와 경영에 의존하는 대형 개발은행으로 설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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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조선식산은행 원주지점은 일제강점기 일제의 경제적 침략에 큰 역할을 한 조선식산은행 원주지점으로, 원주 지역에서 맨 처음 건립된 은행이다. 조선식산은행은 1906년 6월부터 각 지방에서 설립된 6개 농공은행 권리와 의무를 계승한 은행으로서, 조선총독부가 조선에서 농업생산을 극대화하기 위해 일본인의 직접적인 투자와 경영에 의존하는 대형 개발은행으로 설립했다.

서울 강동구 천호동에 있는 구강사는 서울 동부지역 천태법음 요람이자 포교도량으로 대한불교천태종 소속 사찰이다. 5층 단독 건물로 5층에 법당이 있으며, 3층에는 교육시설인 금강유치원이 있다. 정기법회는 매월 넷째 주 일요일 오전 11시에 열리고 있으며, 불교대학도 운영되고 있다.

대전광역시 유성구에 위치한 광수사는 대한불교천태종 사찰로 1995년 지어졌다. 생활불교, 대중불교의 삼대지표를 행하고 있는 관음기도 도량이다. 사찰에는 웅장함이 느껴지는 3층 높이의 대적광전을 비롯해 포대화상, 대자대비 관음보살상 등이 있다. 대적광전으로 향하는 길에 거대한 규모의 관세음보살 좌상과 드넓은 연꽃밭을 만날 수 있다.
광양김시식지는 세계 최초로 김을 양식한 역사적인 장소로, 김양식법을 창안한 김여익을 기르는 영모재, 위패와 묘표문이 보관된 인호사, 김의 유래와 역사를 담은 역사관, 김 생산 도구 등이 전시된 유물전시관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해마다 음력 10월 10일, 내삼문 안쪽 인호사에서 김여익 공을 추모하는 시제를 지낸다.
선사시대의 유적인 고인돌과 지압로등 체육시설, 벚나무길로 조성되어 있다. 동패동 교하중학교 인근 다율동과 당하동, 교하동이 인접한 구릉지대에는 100 여기가 넘는 고인돌이 무리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군사시설 조성과정에서 고인돌 대부분이 파괴되었고, 20 여기만이 남게 되었으며 그 가운데 상태가 양호한 6기가 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다율동에서 발굴된 고인돌은 이미 훼손된 상태였기 때문에 본래의 하부구조가 제대로 남아 있지 않지만, 탁자식으로 추정된다.

공주서혈사지는 웅진동 우뚝 솟은 망월산의 동쪽에 자리 잡은 옛 절터이다. 이곳에서 발견된 기와에 서혈사라고 적혀 있었고, 백제의 전형적인 연꽃무늬 와당과 통일신라와 고려시대의 각종 기와류, 석탑부재, 초석들이 발견되어 백제 때 지은 사찰로 추정된다. 서혈사지는 완만하게 경사진 밭을 3단계로 구분하여, 석축을 쌓고 지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사된 내용에 따르면 불도를 닦던 곳의 배치가 지형과는 관계없이 남쪽을 향해 탑, 불당과 함께 직선상에 놓았음을 알 수 있다.
관음정사는 김해시 진례면 신안리 평지마을 불모산 자락에 위치한 사찰로 템플스테이를 운영하고 있다. 도시의 삭막함과 세속의 번뇌를 벗어나 산사에서 일상생활 체험을 통해 조용히 자신의 내면세계를 성찰하고 자아발견의 계기를 마련하는 정신적인 풍요로움을 느낄 수 있다. 템플스테이 종류로는 휴식형과 맞춤형이 있다.
구니서당은 300여 년 전 김굉필의 후손들이 세운 것으로, 봉선소로 사용하기 위해 건립되었다. 그 뒤 묘각이나 서당으로 사용하였다. 조선 고종 3년(1866)에는 김굉필의 둘째인 김찰휘 언상공을 비롯한 4명의 위패를 모시고 서원으로 지었으나, 고종 5년(1868)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철폐되었다. 1916년 규모를 넓혀 지금의 정당을 중수하였고, 사현사는 1943년에 창건한 건물을 1986년부터 9년에 걸쳐 동·서재 및 문루와 함께 중창하였다.

구계서원은 사천읍 구암리 만죽산 기슭에 자리하고 있다. 조선 명종(재위 1545∼1567) 때 학자인 구암 이정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구암 이정은 중종 31년(1536) 진사로 별시문과에 장원급제하여 높은 벼슬을 두루 거친 문신이자 학자였다. 성리학에 밝았으며 후진양성 교육에 힘을 기울였다. 이 서원은 선조 39년(1606)에 세웠으며, 광해군 3년(1611) 사당인 구산사를 세웠다.
광천서원은 안명하 선생(1682~1752)의 제향을 위하여 건립한 서원이다. 안명하 선생은 본관이 광주이고, 자가 국화이며, 호가 송와로 조선 단종 때 경상남도 함안군에서 밀양 삽포리(지금의 경상남도 밀양시 부북면 후사포리)로 전거 한 안억수의 9 세손이다. 안명하 선생은 평생 출사하지 않고, 이황의 학통을 계승하고 연구하여 성리학과 예학의 경지가 높았으며, 대학자 이상정(1711~1781), 정만양(1664~1730) 등과 교유하였다.

남양 홍씨 홍의와 홍관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서원이며, 홍의(? ~1356)는 고려 공민왕(재위 1351~1374) 때 무신이고, 홍관(? ~1126)은 문신이며, 서예가로 예부상서 등 여러 벼슬을 거쳤다. 세울 당시에는 선현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기능만 담당하던 홍복사로 세웠다가, 영조 23년(1747) 홍지암으로 이름을 바꿨다.
창녕 관산서당은 정면 4칸, 측면 1. 5칸 규모로 전면의 반칸을 퇴칸으로 한 축조한 형식이다. 대청에는 우물마루를 깔았으며 우측방의 전면 툇마루는 한단 올려 대청과 높이가 다르게 시설하였다. 방의 창호는 모두 세살문을 사용하고 있다. 좌측방에는 두 짝, 우측방에는 외짝의 세살문을 달았고 대청의 뒷벽에는 판장문을 달아 고급스럽지는 않지만 소박한 형태이다.

구만서원은 1676년에 사림에서 건립하였다. 금인, 남몽오, 박선장, 권호신 등 4현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건립한 서원이다. 묘호를 기영사(耆英祠)라 하다가 1766년에 구만서원으로 승격한 뒤, 1868년에 흥선대원군의 훼철령으로 철폐되었다가 1967년에 지방 유림에 의하여 복원되었다. 전체적인 배치는 사당인 상현사와 강당이 좌우로 배치되어 있는데, 주위에는 방형의 판축담장을 두른 후 전면에는 사주문을 세웠으며 두 공간 사이에는 일각문을 세웠다.

익재 이제현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영정과 위패를 모신 서원이다. 이제현은 고려 후기의 학자이며 정치가이다. 학자로서 이제현은 뛰어난 유학자로 성리학을 수용·발전시키는데 매우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 문학 부문에서도 그는 대가를 이루었다. 많은 시문을 남겼고, 고려의 한문학을 발전시켜 한 단계 높게 끌어올렸다. 한편 사학(史學)에도 많은 업적을 남겼다. 그의 저술로 현존하는 것은 『익재난고』10권과 『역옹패설』2권이다.

광남서원은 조선 초의 문신 황보인(1387~1453)과 그의 아들 황보석, 황보흠을 배향하기 위하여 1791년(정조 15) 지방 유림들과 후손들이 세운 세덕사가 시초이다. 이후 1831년(순조 31) 임금으로부터 사액서원으로 승격하였으나, 1868년(고종 5)에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따라 철폐되었다가, 1900년에 다시 복원하였다.

경산시 용성면에 위치한 관란서원은 조선 후기 학자 이언적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한 서원이다. 1660년 지방유림들의 공의로 이언적의 도덕과 학문을 추앙하여 창건하고 위패를 모셨고, 그 뒤 1715년과 1743년에 묘우를 중수하여 선현 배향과 지방 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왔다. 1869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된 뒤, 서당으로 명칭을 변경하여 유생들의 학문을 닦는 곳으로만 사용되었다. 경내의 건물로는 3칸의 강당과 2동 5칸의 고사, 대문 등이 있다.

청주 구계서원은 조선 후기 선현의 학덕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한 서원이다. 1647년 지방 유림이 괴산군 청안면 석곡리에 선현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였으며 이준경, 서사원, 박지화, 이득윤, 이당의 위패를 모셨다. 선현의 배향과 지방 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오던 이곳은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고종 5년(1868)에 헐어서 치워졌다.

향교는 훌륭한 유학자를 제사하고 지방민의 유학교육과 교화를 위하여 나라에서 지은 교육기관이다. 구례향교는 중종 13년(1518년)에 구례군 백련리 서북쪽에 세웠는데, 향사(享祀) 때마다 호랑이가 나타나 숙종 30년(1704년)에 이곳 봉서리로 옮겨왔다. 대성전, 내삼문, 동재·서재, 명륜당, 외삼문 등이 남동향으로 향교의 일반적 배치인 전학후묘를 따르고 있다.

공주향교는 처음 지은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원래 웅진동 송산리에 있었으나 인조 원년(1623)에 현재의 자리로 옮겨지었다고 전한다. 그 뒤 여러 차례 보수가 있었고, 1954년 문묘, 명륜당, 동재, 존경각 등을 보수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경내는 2단으로 땅이 나뉘어 있는데, 외삼문을 들어서면 강당인 명륜당이 있고 그 양쪽에 동재와 존경각이 있다.
관수옥은 초량왜관의 우두머리인 관수가 머물던 곳이다. 당시에는 용두산을 중심으로 동쪽이 가장 먼저 시가지가 발달하기 시작하였는데, 바다에서 배를 대는 선착장이 가깝기 때문이다. 일본 사람들이 배로 들어와 동쪽을 중심으로 살기 시작했고, 관수옥을 지나 왜관으로 들어갔을 것이다. 관수옥이 있던 자리에는 지금도 돌계단이 남아있다. 초량왜관은 일본과 우리나라의 무역에서 중심 역할을 했던 곳이다.
괴산 정인지 묘소는 조선 초기의 대학자이며 정치가였던 학역재(學易齋) 정인지(1396∼1478)의 묘소이다. 태종 14년(1414) 과거에 장원으로 급제한 후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고, , , 등 각종 편찬 사업에 참여하였다. 또한, 세종 때에는 집현전 학사로 집현전 직제학, 부제학 등을 지내면서 성삼문, 신숙주, 최항과 함께 훈민정음(訓民正音)을 창제하는데 공을 세웠다.
이 건물은 조선 중기의 명신(名臣)인 소재(蘇齋) 노수신이 유배되었을 때 거처하던 곳이다. 노수신(1515-1590)은 중종 38년(1543) 문과에 급제하여 퇴계(退溪) 이황(李滉)과 같이 독서당에 뽑혀 함께 학문을 연구하다가 을사사화(乙巳士禍)로 관직에서 파면되어, 순천·괴산 등지에서 유배생활을 하다가 선조 즉위 후 복직되어 후에 영의정에까지 오른 인물이다.

향교는 훌륭한 유학자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며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해 설립된 고려·조선시대의 국립 교육기관이다. 교하향교는 경기도 문화재로 지정된 파주시를 대표하는 조선시대 관립학교이다. 파주시에는 파주향교, 교하향교, 적성향교 총 3곳의 향교가 있는데 그중 하나이다. 교하향교는 본래 조선 초 1407년(태종 7년)에 탄현면 갈현리에 창건되었는데, 1731년(영조 7) 파주 장릉의 능기로 정해져 지금의 자리로 옮겨 세웠다.

포은 정몽주와 회재 이언적의 위패를 봉안한 서원으로 강학과 교화, 제향 등을 하며 조선시대 선비를 양성했다. 숙종 4년(1678)에 세웠으며 숙종 20년(1694)에 구강서원이라는 사액을 받아 약 200여 년 동안 강학과 향사를 봉행해 오다가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고종 8년(1871)에 철폐되었다.

김완(1577~1635)은 영암 출신의 조선 후기 무신으로 정유재란과 이괄의 난 때 공을 세운 인물이다. 구고사는 김완 장군의 위훈을 기리는 사당으로 김완 장군의 신위가 모셔져 있고, 부조묘는 보물로 지정된 김완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다. 구고사는 김완 장군의 충절을 추모하기 위해 인조 18년(1640)에 처음 창건되었다. 이후 문중 선조이자 고려 말 대제학인 김진문과 조카 김여준, 김여옥을 함께 모시게 되었다.

노고단에서 왕시루봉 능선을 따라 이어지는 산맥에 위치하며, 칠봉산 남쪽 봉우리 20m 아래에서부터 칠의사 아래 후면까지 이어져 있는 고려 시대 성곽이다. 삼한시대에 마한과 진한의 경계였으며, 삼국시대에는 백제와 신라의 경계로 군사상 요충지였고, 고려 때에는 남해에서 침입한 왜구를 막기 위해 성을 쌓은 곳이기도 하다.
태조 7년(1397)에 세운 광양향교는 임진왜란(1592) 때 불에 타 없어진 것을 광해군 5년(1613)에 광양현감과 지방 유림이 힘을 모아 대성전을 지으면서 점차적으로 건물을 지었다. 그 뒤 여러 차례 수리가 있었으나, 한국전쟁 때 완전히 없어진 것을 1966년에 출입문인 풍화루를 돌기둥으로 대신하여 세운 것을 시작으로 건물을 다시 지었다. 현재 남아있는 건물은 대성전·명륜당·풍화루·동재·서재 등이 있다.
인천광역시 항동에 있는 인천우체국은 일제강점기 우편 업무를 담당하던 건물이다. 인천우체국은 일제강점기인 1923년 12월 10일 건축됐다. 우편 업무를 담당하기 위한 목적으로 지은 근대식 건물로, 당시 행정 관청 건물 중에서 큰 규모로 만들어졌다. 총면적 1,787㎡, 약 540평으로 웅장한 건물이었다. 건립 당시의 명칭은 인천우편국이었으며, 해방 이후인 1949년 8월에 인천우체국으로 바뀌었다.
관훈동 30-1에 위치한 민씨 가옥은 조선 말기의 정치인이자 친일인명사전에 등록된 민영휘 일가가 거주한 곳이다. 민영휘는 일제강점기 판서, 한일은행 은행장 등을 역임한 관료로 막대한 부를 누렸으며 1895년 안국동으로부터 교동으로 이주하면서 관훈동 일대의 토지를 매입해 일가를 거주하게 했다. 1936년 기준으로 총 6동의 목조와즙과 2층 양옥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1976년 가옥 중 일부가 멸실되고 안채 일부와 문간채 등 목조와즙 2동만 남아있다.

관응사는 김제에서 전주로 가는 길에 있는 금천호수 인근의 대한불교 관음종 소속 사찰이다. 속칭 각시골이라 불리는 관응사 절터에는 예로부터 내려오는 전설이 있는데 첩첩산중으로 한 각시가 들어가 이를 기이하게 여긴 마을 사람들이 뒤를 따라가 보니 현재의 절터에서 사라져 이곳에 절을 짓게 되었다고 전한다. 또 이곳의 관음보살에게 치성을 드리면 소원을 이룰 수 있다고 전하며 이 관응사 터를 각시골이라고도 한다. 지금도 이러한 전설이 전해져 많은 불자들이 찾고 있다.

괴산군 청천면에 있는 고택으로 19세기 후반에 지어진 전통가옥이다. 조선시대 전통가옥의 아름다움이 잘 남아있는 곳이다. 안채와 사랑채, 곳간채, 사당채 등이 남아 있다. 안채와 사랑채는 모두 ‘ㄷ’자형으로 동서로 나란히 서있고 중간에 낮은 담장으로 구분이 되어 있다. 안채 앞에는 ‘一’ 자 형태로 곳간채가 길게 세워져 있다. 3칸 크기의 대문채를 지나 안으로 들어서면 사랑채가 있다.
괴산 보안사 석조약사여래좌상은 본래 노천의 석단(石壇)에 모시어 불공을 드리고 있었던 것을 현재 법당을 지어 그 안에 주존불로 봉안하고 있다. 이 불상은 금박(金箔)을 칠하였으나 원형은 잘 남아있다. 머리에는 낮은 육계(肉? )가 있고 미간의 백호(白毫)와 이목구비가 정연하다. 상호(相好)는 살이 쪘으나 목에 돌린 삼도가 양 귀와 잘 어울리어 준엄한 인상을 주고 있다.
이 정문은 장담의 정려로 영조 5년(1729) 청안면 청룡리에 세운 것을 조천리로 이건한 것이다. 장담은 호는 수풍정, 본관은 인동으로 통례 장인계의 후손이다. 영조 4년 청주에서 이인좌의 난이 일어나자 벼슬이 없는 처사로서 의병을 일으켜 난을 진압하다 순절하니 그의 동생 장환이 나머지 군사로 적을 토벌하여 복수하였다. 후에 이 사실이 주문되어 충신으로 정려 되고 분무원종훈 1등 공에 록선 되었으며, 정조조에 표충을 명하고 좌승지에 증직 되었다.
봉학사지 석조여래좌상은 불신만 남아 있는 것을 불두를 찾고, 왼쪽 팔목의 보수를 제외하면 보존상태가 좋은 편이다. 신체에 비해서 큰 얼굴은 앞으로 숙여져 있으며 옷은 왼쪽 어깨만을 감싸고 있다. 손은 오른손 바닥을 무릎에 대고 손끝이 아래를 가리키고, 왼손은 손바닥을 위로 향하게 하여 배꼽 앞에 놓은 모습이다. 오른발을 왼쪽 넓적다리 위에 얹어 놓은 앉은 자세는 그 예가 드문 편이다.
당간지주는 사찰 입구에 설치하는 것으로, 절에 행사나 의식이 있을 때면 이곳에 당이라는 깃발을 달아두는데, 깃발을 거는 길쭉한 장대를 당간이라 하고, 당간을 양쪽에서 지탱해 주는 두 돌기둥을 당간지주라 한다. 이 당간지주는 양 기둥에 별다른 조각이 없다. 기둥 사이에는 당간을 꽂았던 둥근 받침돌이 2단으로 마련되어 있는데, 그 윗면 가운데에 높이 솟아오른 부분을 두어 여기에 깃대를 끼웠던 것으로 보인다.
괴산 삼방리 마애여래좌상은 높이 3. 7m, 폭 4. 1m, 두께 2. 4m의 바위의 한쪽 면에 새긴 높이 3. 5m의 마애불이다. 낮은 연꽃대좌 위에 결가부좌한 이 좌상은 통견의 법의를 걸치고 있는데 왼손은 무릎 위에 얹고 오른손은 가슴 앞에서 독특한 수인을 보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