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암리남근석
남근석은 남자의 성기 모양을 한 자연 암석이나, 암석을 조각하여 세운 것을 말하는데, 사람들이 섬기는 민간신앙 중 성기 숭배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흰 바위 마을 입구 서쪽에 자리하고 있는 이 남근석은 이 마을에 있는 12 당산 중의 하나로, 일명 자지바우라고도 불린다. 높이는 1. 35m로 네모난 단 위에 길고도 곧게 뻗어 있다. 꼭대기 부분은 약간 뾰족하게 깎은 후 둥글게 처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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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근석은 남자의 성기 모양을 한 자연 암석이나, 암석을 조각하여 세운 것을 말하는데, 사람들이 섬기는 민간신앙 중 성기 숭배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흰 바위 마을 입구 서쪽에 자리하고 있는 이 남근석은 이 마을에 있는 12 당산 중의 하나로, 일명 자지바우라고도 불린다. 높이는 1. 35m로 네모난 단 위에 길고도 곧게 뻗어 있다. 꼭대기 부분은 약간 뾰족하게 깎은 후 둥글게 처리하였다.
정읍시 이평면 면사무소 앞 도로 건너편에 위치한 말목장터는 1894년 동학농민운동 당시 배들평 농민 수천 명이 고부로 가기 전에 모였던 곳으로 제1차 백산기포를 할 때까지 장두청을 두고 진을 설치했던 장소이다. 또한 이곳에는 180년 정도 된 감나무 한그루가 서 있는데, 이 나무 아래에서 말목장터에 모여든 농민들에게 전봉준이 군수 조병갑의 탐학과 농민 수탈의 실정을 알리고 농민봉기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고 전한다.

이곳은 만석대교와 제방 사이에 위치한 고부군수 조병갑이 쌓은 만석보의 터다. 보(洑)란 논에 물을 대기 위한 목적으로 둑을 쌓고 냇물을 가두어 두는 곳을 말한다. 신태인에서 고부로 가는 지점의 동진강을 건너는 다리 하류에는 보뚝을 쌓았던 흔적이 남아 있다. 주위에는 넓고 비옥한 배들 평야가 펼쳐져 있다. 이 너른 평야에서 1만 석이나 되는 많은 쌀을 거둬들일 수 있다 하여 만석보라 이름하였지만, 굶주리고 착취당해야 했던 농민들의 분노가 서려있기도 하다.
정암 조광조를 중심으로 덕촌 최희정을 기리고 있는 서원으로 1960년 지방 유림이 지었다. 조광조(1482∼1519)는 조선 전기의 문신이며 성리학자이다. 김종직의 학통을 이어 사림파의 중심이 되었으며 급진적인 개혁을 실행하였다. 이를 반대하는 훈구세력의 모함으로 유배되어 기묘사화(1519) 때 희생되었다. 최희정은 조광조의 가르침을 받았고 조선 중종 11년(1516) 무과에 급제하였다. 이때 함경도에 여진족이 침입하자 조광조가 추천하여 적을 크게 물리쳤다.
이희맹·김제민·최안·김지수를 비롯하여 김제안·김흔·김섬·김습 등을 기리고 있는 서원이다. 이희맹은 조선 전기 문신이며 김종직의 제자로 성균관 재학시절부터 문장과 인품으로 인정을 받았다. 성종 23년(1492)에 장원 급제하여 등용되었으며 이후 여러 벼슬자리를 거쳤다. 김제민(1527∼1599)은 이항의 제자로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으며 임진왜란 때에는 의병을 모아 왜군과 싸워 공을 세웠다.

정읍시 태인면 소재지에서 있는 항가산을 올라가면 중턱에 다천사가 있다. 500년이 넘는 느티나무가 있는 다천사는 옛날 절이 있던 자리라고 하는데 벽산스님이 1930년경 이 절을 창건했다. 항가산은 불교적 향기가 가득한 곳으로 항가산이라는 이름은 항하사의 항 자에다, 석가모니의 가 자를 합쳐 만들어진 산이다. 그 뜻은 수 많은 모래와 같이 부처님이 많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한편 다천사라는 이름은 차를 끓여도 좋을 만큼 맑은 물이 있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아름다운 내장산국립공원의 품 안에 안겨 있는 내장사는 636년(백제 무왕 37) 영은조사(靈隱祖師)가 창건하여 영은사(靈隱寺)라 하였으며, 이때의 가람규모는 50여 동이었다고 한다. 1098년(숙종 3) 행안(幸安)선사가 전각과 당우를 새로 건립하고 중창하였고 1557년(명종 12) 희묵(希默)대사가 영은사의 자리에 법당과 요사채를 건립하고 산 안에 무궁무진한 보물이 숨어있다 하여 절 이름을 내장사라 하였다.

정읍 신태인간 지방도로변에서 더 들어간 곳에 있는 낮은 산인 남산에 남산사가 있다. 남산에는 예부터 반야선터라 하여 알려져 있는 선의 도량으로 병자호란 이전에는 승려가 100여 명이나 기거한 큰절이었다고 한다. 이 절은 옛날에는 한적사(閑寂寺)라 했다. 지금도 절터였던 주추돌과 기와장이 무수히 나오고 있다.
일재 이항·건재 김천일을 비롯하여 김점·김복억·김승적·소산복을 기리고 있는 서원이다. 이항(1499∼1576)은 조선 중기 문신으로 성리학에 조예가 깊은 학자이다. 김천일(1537∼1593)은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왜군을 무찌른 장수이다. 이 서원은 선조 10년(1577)에 이항과 김천일을 추모하기 위해 세웠고 숙종 11년(1685) 임금으로부터 ‘남고’라는 이름을 받아 사액서원으로 승격되었다.
향교는 공자와 여러 성현께 제사를 지내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해 나라에서 세운 교육기관이다. 고부향교는 처음 지은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진 것을 선조 30년(1597)에 지금 있는 자리로 옮겨 세운 것이라고 한다. 현재 남아있는 건물로는 대성전, 명륜당, 동무·서무, 직사, 내삼문, 외삼문, 홍살문 등이며, 전해오는 유물로는 제기, 제복, 서적들이 있다. 대성전은 제사를 지내는 공간으로, 교육 공간인 명륜당보다 위쪽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