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산서원(대구)
조선 영조 11년(1735년)에 후손들이 손린(孫遴) 선생의 사당을 지음으로써 시작되어 조선 순조 3년(1803년)에 봉산서원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러나 1864년 서원 훼철령으로 서원은 없어지고 1967년에 다시 강당을 지어 경모재(敬慕齋)라고 하였다. 그리고 1996년에 후손들의 노력으로 강당인 지행당(砥行堂), 동재 자리에 사당인 봉암사(鳳岩祠)와 서재인 송독재(誦讀齋)를 세우고 손린 선생을 기리는 유허비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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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영조 11년(1735년)에 후손들이 손린(孫遴) 선생의 사당을 지음으로써 시작되어 조선 순조 3년(1803년)에 봉산서원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러나 1864년 서원 훼철령으로 서원은 없어지고 1967년에 다시 강당을 지어 경모재(敬慕齋)라고 하였다. 그리고 1996년에 후손들의 노력으로 강당인 지행당(砥行堂), 동재 자리에 사당인 봉암사(鳳岩祠)와 서재인 송독재(誦讀齋)를 세우고 손린 선생을 기리는 유허비도 세웠다.

독무재는 벼슬도 마다하고 향리에 은거하며 후진 양성에 전념한 하시찬을 추모하기 위해 그의 문인과 유림들이 힘을 모아 건립한 추모 재실이다. 하시찬은 1750년 지금의 대구 수성구 만촌동에서 태어나 당대의 석학이던 김경호, 송성담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지금의 독무재가 있는 곳에서 서쪽으로 떨어진 곳에 독무암루를 짓고 후학을 양성하였고, 팔례절요 2권을 저술하기도 하였다.

이 서원은 조선조 초기 문신으로 대쪽 같은 절개를 지켰던 남은(南隱) 서섭(徐涉)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첨모재(瞻慕齋)를 1993년 서원으로 복설(復設) 한 것이다. 서섭은 달성서 씨 판서공파 파조(派祖)로 세종 때 대과에 급제한 후 단종 때 이조판서를 지낸 인물인데 세조의 왕위 찬탈로 관직을 사직하고 낙향하여 남애(南涯)라는 호를 남은(南隱)으로 고치고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은둔하였다.

고산서당은 처음에 서재(書齋)로 건립되었다가 서원과 서당으로 이름을 바꾸면서 이 지역의 대표적인 유학 교육 기관이자 선현을 제향(祭享)하는 공간으로 중요한 역할을 해 온 곳이다. 건립된 시기를 정확하게 파악하기는 어려우나, 퇴계 이황(退溪 李滉, 1501~1570)과 우복 정경세(愚伏 鄭經世, 1563~1633)가 이곳에서 강론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1500년대에 건립된 것으로 보인다. ‘고산(孤山)’이라는 이름도 퇴계에게 요청하여 받은 것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