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슬산 유가사
비슬산 서쪽 기슭에 위치한 유가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9교구 본사인 동화사의 말사이다. 신라 흥덕왕 2년인 827년에 도성이 창건하였고, 고려 3대 종파 가운데 하나였던 유가종의 중심 도량이기도 했다. 유가종의 총본산격인 사찰로 전성기에는 3,000여 명의 승려들이 머물렀으며, 일연스님도 한때 이곳에 기거하였다. 이후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으나 1976년에 대웅전과 용화전을 중창하는 등 대대적인 불사를 일으켜 오늘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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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슬산 서쪽 기슭에 위치한 유가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9교구 본사인 동화사의 말사이다. 신라 흥덕왕 2년인 827년에 도성이 창건하였고, 고려 3대 종파 가운데 하나였던 유가종의 중심 도량이기도 했다. 유가종의 총본산격인 사찰로 전성기에는 3,000여 명의 승려들이 머물렀으며, 일연스님도 한때 이곳에 기거하였다. 이후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으나 1976년에 대웅전과 용화전을 중창하는 등 대대적인 불사를 일으켜 오늘에 이른다.

절강 장씨의 시조인 장해빈을 봉향하기 위해 세워진 서원으로 1684년 창건되었다. 장해빈은 중국 항주의 조강현 출신으로 조선 선조 정유재란 때 장수로 와서 귀화한 뒤 군위에 정착했다. 군위에 정착하여 살아온 절강 장씨 문중에서 소유와 관리를 맡고 있다. 1868년(고종 5)에 흥선대원군의 서원 훼철령으로 훼철되었으나 1959년 중건하여 북산서원으로 승격되었다.
조선 영조 11년(1735년)에 후손들이 손린(孫遴) 선생의 사당을 지음으로써 시작되어 조선 순조 3년(1803년)에 봉산서원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러나 1864년 서원 훼철령으로 서원은 없어지고 1967년에 다시 강당을 지어 경모재(敬慕齋)라고 하였다. 그리고 1996년에 후손들의 노력으로 강당인 지행당(砥行堂), 동재 자리에 사당인 봉암사(鳳岩祠)와 서재인 송독재(誦讀齋)를 세우고 손린 선생을 기리는 유허비도 세웠다.
조선 고종 12년(1875)에 달성 지역의 토호인 최상룡이 문회를 위해서 건립한 정자이다. 만년에 학문을 강론하면서 마을 공동체를 유지하려는 뜻이 담긴 공공 건축물이다. 원래 이 자리에는 달성군 공산면 4개 마을(강동·독좌·위남·단산)에서 쓰던 초가 사무소가 있었으나, 이 4개 마을을 합쳐 봉무동으로 행정구역이 바뀌자 초가를 헐고 이 건물을 지었다.

목화를 전래한 고려시대의 문신 문익점(文益漸, 1329~1398), 물레를 고안한 문래(文來), 직조법을 발명한 문영 (文英)등을 배향하고 있다. 1861년 창건하였으며, 1960년 현재의 서원터에 문중의 후손들이 신실인 경현사, 삼문, 강당, 외삼문인 상의문, 충선공 유허비각 등을 중수하였다. 남평문씨(南平文氏) 종중에서 소유와 관리를 맡고 있으며, 해마다 음력 3월 중정(中丁)에 제사를 지낸다.

성주 도씨 서촌계의 랜드마크인 병암서원은성주 도씨 도응유(都應兪)와 경유(慶兪) 형제를 배향하고 있는 서원으로 대구 달서구 용산동 성산 고등학교 옆 대로변에 자리하고 있다. 병암서원의 시작은 인조 3년인 162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성주의 선비 도경유가 낙음정사를 세워 제자들을 가르쳤던 것이 후에 병암서당으로, 다시 병암서원으로 발전했다. 1868년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병암서원도 헐렸으나 후손들이 1924년 현재 위치에 복원했다.

소보면 달산리 서북방 청화산의 동남쪽에 우뚝 솟은 봉우리에 자리 잡은 법주사는 신라 소지왕 15년에 심지왕사가 창건했으나 조선 인조원년에 소실되어 현종원년(1660)에 재건된 전통사찰이다. 법주사는 영천시에 있는 은해사의 마지막 사찰로서 지금은 경내에 보광명전과 부속건물과 산신각, 맷돌, 그리고 법당 앞에 서 있는 본존 5층 사리탑(법주사 오층석탑)이 있다.
법장사는 대구 사람들에게는 '앞산'이라고 불리는 대덕산 고산골 깊은 골짜기에 자리잡고 있는 고찰이다. 대한불교 조계종 제9교구 본사 동화사 말사이며, 창건 연대 및 중창의 역사는 전래되지 않았지만 구전 및 현존하는 유물로 보아 신라 말기에 창건된 사찰로 전해지고 있다.

백원서원은 효자로 이름이 났던 전귀당(全歸堂) 서시립(徐時立)(1578~1665)을 제향 하는 서원이다. 서시립의 자는 입지(立支), 호는 전귀당이며, 달성서씨 감찰공파 파조인 서근중의 6세손이다. 서시립의 호 전귀당은 임진왜란 이후 오봉 이호민이 왕자 태실사(胎室使)로 대구지역에 들렀다가 서시립의 효행을 듣고 지어준 호이다. 온전한 몸으로 태어나 온전하게 돌아간다는 의미이다.
박곡서당은 조선 태종 때 경상도, 경기도, 풍해도 ‘황해도’ 관찰사와 예조판서를 역임한 전백영의 추모 재실이자 서당이다. 박곡서당은 상원리 박실에 있다. 본래 이 재실은 내상원[안상원] 선생 묘소 곁에 있었다. 이후 1871년 서원철폐령으로 인근 행정리 한천서원이 헐릴 때, 그 재목을 가져다 1872년경 안박실에 있는 정부인 인천이씨 묘소 옆에 재실을 다시 세웠다.

대구광역시 군위군 부계면 창평리에 있는 문양서원은 1793년(정조 17) 이언을 모시기 위하여 건립되었으며,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72년에 복원되었다. 오랫동안 이 지역에서 세력을 형성해 온 흥양 이씨 문중에서 소유와 관리를 맡고 있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사당인 경현사와 강당, 외삼문인 회진문, 동재 등 총 4동의 건물로 구성되어 있으나, 서재의 경우 시멘트로 수리·보수되어 과거의 구조 형식을 알 수 없다.

달성군 묘골마을은 낙동강 동안에 자리 잡고 있는 전통마을로 사육신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박팽년의 후손들이 모여사는 순천 박 씨 집성촌이다. 박팽년은, 세조 2년인 1456년 사육신들과 모의하여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실패하여 멸문의 화를 입게 되었다. 그러나 박팽년이 혈통을 보전하게 된 이유는 당시, 박팽년의 둘째 아들 박순의 아내 이 씨 부인이 임신 중이었기 때문이다.

1705년(숙종 31)에 송원기(1548∼1615)를 향사하기 위해 건립된 서원이다. 후대에 그의 후손인 송명기, 송이석 부자를 추가로 배향하였다. 1868년(고종 5)에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된 이후 복건과 소실되기를 반복하다 2006년에 복원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매양서원은 주향인 송원기의 입묘를 계기로 칠곡에 이주, 정착하여 세거해온 야로 송 씨 문중의 성장 과정을 잘 보여준다. 조선 후기 칠곡지역의 대표적인 문중서원 중 하나이다.
동화사는 유서 깊은 신라 고찰로 팔공산 폭포골, 빈대골, 수숫골이 좌우로 몰려든 동학동 골짜기에 자리 잡고 있다. 대한불교 조계종 제9교구 본사이다. 493년(소지왕 15) 극단이 창건하여 유가사라 하였다. 그 뒤 832년(흥덕왕 7) 왕사 심지가 중창하였는데, 그때가 겨울철임에도 절 주위에 오동나무꽃이 만발하였으므로 동화사로 고쳐 불렀다고 한다.

독무재는 벼슬도 마다하고 향리에 은거하며 후진 양성에 전념한 하시찬을 추모하기 위해 그의 문인과 유림들이 힘을 모아 건립한 추모 재실이다. 하시찬은 1750년 지금의 대구 수성구 만촌동에서 태어나 당대의 석학이던 김경호, 송성담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지금의 독무재가 있는 곳에서 서쪽으로 떨어진 곳에 독무암루를 짓고 후학을 양성하였고, 팔례절요 2권을 저술하기도 하였다.

도림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12교구 본사 해인사의 말사로서 대구지역의 포교를 목적으로 세워진 대표적인 사찰이다. 이 사찰은 대구의 팔공산 동남쪽 감투봉 아래 위치하고 있으며, 편에는 갓바위 약사여래부처님과 동화사, 파계사 등이 줄지어 서있는 팔공산맥을 마주하고 있다.

도곡재는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곳으로 달성군 하빈면에 위치하였다. 조선 정조 2년(1778)에 대사성인 서정공 박문현이 살림집으로 세운 건물이나, 정조 24년(1800) 경에 도곡 박종우의 공부방으로 사용되면서 그의 호를 따서 도곡재라는 이름을 붙였다. 앞면 4칸·옆면 1칸 규모이며, 후대에 퇴칸을 달고 대청을 넓혀 누(樓)처럼 꾸몄다. 도곡재는 태백산지역 살림집의 일반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는 소박한 건물이다.

이 서원은 조선조 초기 문신으로 대쪽 같은 절개를 지켰던 남은(南隱) 서섭(徐涉)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첨모재(瞻慕齋)를 1993년 서원으로 복설(復設) 한 것이다. 서섭은 달성서 씨 판서공파 파조(派祖)로 세종 때 대과에 급제한 후 단종 때 이조판서를 지낸 인물인데 세조의 왕위 찬탈로 관직을 사직하고 낙향하여 남애(南涯)라는 호를 남은(南隱)으로 고치고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은둔하였다.

향교는 지방에 설립한 국립교육기관으로서,성현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기능과 학생을 교육하는 강학 기능을 동시에 담당하였다. 1400년에 불타자 곧 재건하였고 임진왜란 때 다시 소실되어 1599년(선조 32) 현재의 달성공원 부근에 재건하였다. 1605년 교동으로 이건하여 명륜당을 중건하였으며, 1932년 현 위치로 이건 하였다.

사직은 토지를 관장하는 사신과 곡식을 주관하는 직신을 가리키며, 두 신을 제사 지내는 단을 만들어 모신 곳이 사직단이다. 토지를 주관하는 사신과 오곡을 주관하는 직신에게 고을의 백성이 편안하게 살 수 있도록 풍요를 기원하는 제사를 지내는 제단으로, 매년 중춘과 중추에 사직제를 지내고 나라의 큰일이나 가뭄이 있을 때에는 기우제를 지내기도 하였다.

달성 하목정은 임진왜란 때 의병장이었던 낙포(洛浦) 이종문(李宗文)이 1604년(선조 37)에 세운 것이다. ‘하목정’이라는 정호(亭號)는 인조가 왕위에 오르기 전에 이곳에 머문 적이 있어 그 인연으로 이종문의 장남인 이지영에게 직접 써 준 것이다. 이곳은 조선 중기에 건립된 평면형태가 독특한 정자형 별당 건축으로 공간구성과 세부기법 및 의장 등에는 많은 특색이 나타나고 있어 역사적, 건축적, 학술적 가치가 뛰어난 곳이다.

현풍석빙고는 얼음을 저장하기 위해 돌을 쌓아 만든 창고이다. 남북으로 길게 축조되어 있으며, 출입구가 개울을 등진 능선 쪽에 마련된 남향구조이다. 돌의 재질은 모두 화강암으로 외부에서 보면 고분처럼 보인다. 입구는 길쭉한 돌을 다듬어 사각의 문틀을 만든 후 외부공기를 막기 위해 돌로 뒷벽을 채웠다. 외부는 돌을 쌓고 점토로 다져서 흙을 쌓아 올렸다.

노태우 대통령 생가는 대구 동구 신용동 팔공산 기슭에 자리 잡고 있다. 신용동이란 명칭은 신령스러운 용이 하늘로 올라간 용지가 있다고 하여 이름 붙여졌다. 신용동에 위치한 용진마을에 가면 노태우 대통령 생가가 있다. ‘용의 머리’에 자리한 명당이라 하며, 안채와 사랑채, 외양간 등이 소박한 모습으로 남아 있어 살아있는 역사 교육 현장으로 이용되고 있다. 용진마을은 교하 노 씨의 집성촌이기도 하다. 마을 주변은 봄철이면 복사꽃이 만발해 장관을 연출한다.

대구광역시 달성군 가창면 우록리 삼정산 기슭에 자리한 녹동서원은 모하당 김충선 장군을 배향하는 서원이다. 장군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향도 유림들이 상소하여 정조 15년인 1791년에 건립하였다. 서원경내는 향양문을 비롯한 녹동서원, 녹동사. 충절관을 비롯해 깁공의 묘소도 서원 뒤편에 자리하고 있다.
고려 보문각 대제학과 판도판서의 관직에 오른 영천이씨 영양군 6세 남곡공 휘 석지와 그의 자제인 집현전 제학과 한성부윤이셨던 장자 휘 안우, 직제학 겸 병조판서이신 차자 휘 아직, 이조 정랑이 신 삼자 휘 안유, 군기사부정 휘 현실, 휘 안실 등 6위를 배향하고 있으며, 매년 음력 3월 첫 일요일 영천이 씨 남곡공파 후손들이 참 석하여 제사를 올린다.
군위군 군위읍 대북리에 있는 남계서원은 조선 중기의 문신 류성룡(1542~1607년)과 이호민(1553~1634년)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기 위해 1581년(선조 14) 3월에 창건되었다. 류성룡이 1583년(선조 16) 경상도 관찰사로 있을 때 남계서당을 건립하였는데, 1607년 세상을 떠난 뒤 1621년(광해군 13) 후학들이 중수하고 서애의 위패를 모셨으며, 남계서원으로 승격시켰다. 이후 1787년(정조 11)에 이호민을 추가 배향하였다.

낙빈서원은 단종의 복위에 목숨을 바친 하위지, 박팽년 이개, 성삼문, 유성원, 유응부를 배향한 서원이다. 본래 충정공 박팽년의 위패를 봉안한 하빈사가 있어 후손들이 향사를 지내왔는데, 현손인 박계창이 사당 밖에서 사육신 여섯 분이 서성거리는 꿈을 꾼 후 깨달은 바가 있어 사육신 여섯분을 함께 모시고 제향하게 되었다. 1691년에는 별묘와 강당을 건립하여 낙빈서원을 창건하였는데, 3년 후 숙종으로부터 사액을 하사 받아 사액서원이 되었다.

낙동서원은 현재 대구광역시 달서구 월곡역사공원에 자리하고 있다. 단양우씨의 현조인 우현보(禹玄寶)와 임진왜란 때 의병장 우배선(禹拜善)을 향사하기 위해 덕동서원이라는 명칭으로 1708년(숙종 34년)에 건립되었다.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된 이후 건물도 없어졌으나 1965년 단양우씨 판서공파 17대손인 우종식, 우종묵 형제가 사비로 다시 건립하여 낙동서원으로 명칭을 변경한 후 향내 유림에 헌납하였다.
남천고택은 군위군에서 가장 오래된 가옥으로 부림 홍씨의 집성촌인 한밤마을(부계면 대율리)에 있으며, 상매택 또는 쌍백당으로 불리어졌다. 부림홍씨는 입향조인 고려 문하사인(門下舍人) 홍로선생이 군위군에 정착하면서 이 지역에 집성촌을 이루었고, 남천고택은 홍노의 10 세손 홍우태의 살림집으로, 이후 맏손자들이 대대로 물려받으며 2명의 과거급제와 1명의 진사를 배출한 집이다.

향교는 국가에서 설립하여 유학을 가르치고 인재를 기르는 지방 교육 기관으로 지금의 중・고등학교 수준의 교육을 담당하였다. 시나 문장을 짓는 법과 유교의 경전과 역사를 가르쳤고 중국과 조선의 성현에게 제사를 올렸다. 갑오개혁 이후 교육 기능은 사라졌으며, 봄가을에 공자에게 석전대제를 지내고 초하루와 보름에 향을 피운다.

군위 인각사지는 군위군 화산의 북쪽 기슭 강가 퇴적지대에 자리 잡은 절터이다. 인각사는 선덕여왕 시절 원효가 세운 절이라 한다. 그 뒤 고려 때에 크게 고쳐 지었고, 일연이 충렬왕 10년(1284)부터 5년간 이 절에서 머물며 삼국유사를 지은 장소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인각사는 언제 세워졌는지 문헌으로는 확인할 수 없다. 그러나 발굴조사 때 대웅전터로 생각되는 건물이 있던 곳에서 통일신라시대의 건물터를 확인하여, 신라 후기에 이미 있었던 것으로 짐작하고 있다.

고려 중기에 한 부호가 문중의 원찰로 금봉산(두류산)에 절을 짓고, 금봉사(金鳳寺)라 했다고 한다. 1926년(병인년)에 김송동 보살님이 지금의 두류실내수영장 별관자리에 대웅전과 요사 2동을 창건하였다. 1986년 대구에서 개최한 전국체전 때 금용사의 부지가 실내수영장으로 편입되면서, 현 위치로 이전하여 중창하였다.

군위 부계면 남산리에는 신라 소지왕 15년 극달화상이 창건한 삼존석굴이 있다. 국보로 지정된 삼존석굴은 깎아지른 듯한 절벽의 자연동굴에 아미타불과 대세지보살, 관음보살이 온화한 자태를 드러내고 있다. 1960년대 말까지 세인들의 눈에 띄지 않았다가 1970년대 초 학자들에 의해 경주석굴암 보다 1세기 이상 일찍 창건된 것으로 그 모태임이 밝혀져 문화유산으로서의 가치성을 인정받았다.

대한 불교조계종 제9교구 본사 동화사의 말사인 관음사는 우리나라 천연기념물 1호인 대구 도동 측백나무 숲 절벽 아래 난간과 계단을 세우고 자리하고 있다. ‘팔공산도동낙가산관음사사적비명’에 의하면, 관음사는 통일신라시대 문무왕 10년(670)에 의상대사가 창건하고, 9세기 초에 심지왕사가 중창하였다고 한다. 이후 관음사는 1933년에 해인대사가 중수하였고 교남지에 '해안면 도동에 관음암이 있다.
관암사는 대구광역시 동구 능성동 팔공산에 위치한 한국불교태고종 소속 사찰이다. 사찰 명칭은 팔공산 관봉(冠峰)의 석조여래좌상이 있는 갓바위 아래에 자리하여 관암(冠巖)이라 하였다고 한다. 신라시대 창건한 고찰이나, 조선시대의 억불정책으로 폐사가 되어 누가 언제 창건한 것인지 정확히 알 수 없다. 현재 관암사는 태고종 총무원장을 지낸 백암승려가 기도 중 불상을 발견하고 터만 남은 곳에 중생들의 안식처가 되도록 서원(誓願)을 세우고 1962년 3월에 재창건하였다.
대구 약령시에 위치하고 있는 국가등록문화재이다. 일제강점기 3. 1 독립운동 때 화합의 공간이자 물산장려운동, 기독교 농촌운동, 신간회 운동 등 기독교 민족운동의 거점이었던 건물이다. 대구 중구 근대역사의 중요한 시설물로 이만집 목사 3. 청년들을 중심으로 각종 사업을 활발하게 진행하였으며 특히 당시 산업의 대부분인 농촌사업을 체계화하고자 전국 각지에 농민학교를 세우고, 협동조합, 농민회, 야학 등을 조직하여 농천 청년들에게 새로운 지평을 열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