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 망덕사지
경주 낭산[狼山]의 기슭에 자리하고 있는 절터로 사천왕사와 마주하고 있다. 처음 지어진 때는 정확하지 않으나 신라 문무왕 또는 신문왕 때로 전한다. 현재 절터에는 동·서 목탑터와 그 북쪽으로 금당터와 강당터, 남쪽으로 중문터, 그리고 이를 둘러싼 회랑터가 남아 있어 통일신라시대 전형의 쌍탑 가람배치를 볼 수 있다. 이밖에 중문터 남쪽에 계단터가 잘 남아 있고 그 서쪽으로는 당간지주(보물)가 그대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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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낭산[狼山]의 기슭에 자리하고 있는 절터로 사천왕사와 마주하고 있다. 처음 지어진 때는 정확하지 않으나 신라 문무왕 또는 신문왕 때로 전한다. 현재 절터에는 동·서 목탑터와 그 북쪽으로 금당터와 강당터, 남쪽으로 중문터, 그리고 이를 둘러싼 회랑터가 남아 있어 통일신라시대 전형의 쌍탑 가람배치를 볼 수 있다. 이밖에 중문터 남쪽에 계단터가 잘 남아 있고 그 서쪽으로는 당간지주(보물)가 그대로 남아 있다.

경주 동천동에 있는 신라 제4대 탈해왕(재위 57~80)의 무덤으로 소나무 숲으로 둘러싸여 있다. 무덤의 형식 자체는 일반적이나, 신라 초기의 왕릉이고 특히 최초의 석 씨 왕릉이라는 점에서 중요하다. 이 무덤은 높이 4. 5m, 지름 14. 3m 크기로 둥글게 흙을 쌓아 올린 봉토무덤이다. 주변에 아무런 시설을 하지 않았으며, 겉으로 보아 굴식돌방무덤(횡혈식석실묘)으로 추측된다. 왕릉 초입에는 탈해왕의 제사를 모시기 위한 전각 숭신전이 있다.

경주 양동마을 송첨종택은 경주 손 씨 큰 종가로 이 마을에서 시조가 된 양민공 손소(1433∼1484)가 조선 성종 15년(1484)에 지은 집이다. 양민공의 아들 손중돈 선생과 외손인 이언적(1491∼1553) 선생이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一자형 대문채 안에 ㅁ자형 안채가 있고 사랑채 뒤쪽 높은 곳에 신문(神門)과 사당이 있다. 안채는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 자 모양인 팔작지붕이고 사랑채는 지붕 옆면이 사람 인(人) 자 모양인 맞배지붕이다.

거창 황산마을은 18세기 중엽에 황고 신수이가 입향하면서 번성한 거창신씨 씨족마을로 마을의 생성은 16세기 초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조선시대 영조 이후 인물이 연이어 배출되었다고 전해진다. 마을 어귀에는 군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는 폭 5m 이상, 높이 15m 이상의 수령 600년에 달하는 고목이 자리하고 있어 마을의 역사를 증언하고 있으며 마을에서는 이 고목을 안정좌 나무라고 부르고 있다.

경주 남산 기슭에 흩어져 있던 것을 1923년 지금의 자리에 모아 세웠다. 이 석불들은 기본양식이 똑같아 처음부터 삼존불[三尊佛]로 모셔졌던 것으로 보인다. 중앙의 본존불은 머리에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가 있는데, 특이하게도 이중으로 되어 있으며, 표면이 매끄럽게 표현되었다. 어린아이 표정의 네모난 얼굴은 풍만하며, 둥근 눈썹, 아래로 뜬 눈, 다문 입, 깊이 파인 보조개, 살찐 뺨 등을 통하여 온화하고 자비로운 불성[佛性]을 표현하고 있다.

신라 31대 신문왕(재위 681~692)의 무덤이다. 신문왕은 문무왕의 아들로 부왕의 뜻을 이어받아 옛 백제와 고구려 백성을 융합하는데 힘썼다. 국립교육기관인 국학을 설립하고, 귀족들의 기반이 되면 녹읍을 폐지하고 관료전을 지급하였다. 지방을 통치하기 위해 전국을 아홉 개의 주로 나누고 중요한 거점 다섯 곳에 소경을 설치하였다. 신문왕이 죽은 후에는 낭산 동쪽에서 장사를 지냈다고 한다. 이 능은 낭산 남쪽 끝자락에 있다. 무덤은 높이 7. 6m, 지름 29.
금귀봉의 동남쪽으로 뻗어있는 산등성이에 자리 잡고 있는 무덤으로 이 일대는 석장골 또는 재궁골이라 불리던 곳이다. 고분의 모양은 능선 상의 좁은 평지 위에 방형으로 지대석을 설치하고 그 위에 호석을 올려놓고 봉토를 쌓은 방형호석 형태이다. 석축의 동쪽, 서쪽에 2구의 석인이 있는데 동쪽 석인은 두관을 착용한 문인석으로 이목구비가 뚜렷한 형상이다. 서쪽의 석인은 가슴 윗부분이 절단되고 하반신만 남아 있으나 동편과 비슷한 형태로 보인다.

조선 연산군 7년(1501)에 요수 신권이 이곳에 들어와 산 이 후, 이 마을은 거창 신씨의 집성촌으로 번창해 왔다. 마을의 중앙에 위치한 이 집은 1927년 신도성이 건립한 근대기 주택으로 원학고가라고도 부른다. 당시 이 집의 주인은 큰 지주였다고 하는데, 이 집은 그러한 집주인의 경제력을 잘 보여주고 있다.

대왕암을 의미 있게 눈여겨볼 수 있는 곳이 두 군데 있다. 대본 초등학교 앞쪽에 있는 이견대와 동해구(東海口)라는 표지석 아래 ‘나의 잊히지 못하는 바다’라는 기념비가 서 있는 자리이다. 이견대는 화려한 능묘를 마다하고 동해 바다의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겠다고 한 문무왕이 용으로 변한 모습을 보였다는 곳이며 그의 아들 신문왕이 천금과도 바꿀 수 없는 값진 보배 만파식적을 얻었다는 유서 깊은 곳이다.

경주 구정동 방형분은 경주에서 불국사로 가는 길의 북쪽 구릉자락에 위치한 통일신라시대의 무덤이다. 이 방형분은 한 변의 길이가 9. 5m 높이가 2m이다. 무덤의 형태는 정사각형이고 흙을 덮어 만든 봉분 아래에는 무덤을 보호하는 의미를 갖는 12지신상이 조각된 둘레돌이 배치되어 있다. 둘레돌을 배치하는 것은 삼국시대 이후부터 내려오는 전통인데, 통일신라시대 경주지방의 왕릉에서는 12지신상을 조각한 둘레돌을 흔히 볼 수 있다.

원성왕릉은 낮은 구릉의 남쪽 소나무 숲에 있는 것으로 신라 제38대 원성왕(재위 785∼798)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원성왕의 이름은 경신이며 내물왕의 12대 후손으로 독서삼품과를 새로 설치하고 벽골제를 늘려쌓는 등 많은 업적을 남겼다. 왕릉이 만들어지기 전에 원래는 작은 연못이 있었는데, 연못의 모습을 변경하지 않고 왕의 시체를 수면 위에 걸어 장례 하였다는 속설에 따라 괘릉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이 능은 원형 봉토분으로 지름 약 23m, 높이 약 6m이다.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가 태어난 전설을 간직한 우물이다. 박혁거세를 기리는 유허비를 비롯해 신궁터로 추정되는 팔각건물지, 우물지, 담장지, 부속건물지, 배수로 등이 남아 있다. 특히 팔각건물지는 한 변의 길이가 8m나 되고 네모난 담장을 두른 것으로 보아 신라의 신궁터로 추정되며 이곳 나정을 박혁거세를 제사 지내는 신전으로 짐작할 수 있다. 와 에 나정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경주 배동 삼릉은 경주 남산의 서쪽 기슭에 동서로 3개의 왕릉이 나란히 있어 붙여졌다. 밑으로부터 신라 8대 아달라왕, 53대 신덕왕, 54대 경명왕 등 박씨 3왕의 무덤이라 전하고 있다. 무덤은 모두 원형으로 흙을 쌓아 올린 형태를 하고 있다. 신덕왕릉이라 전해오는 가운데의 무덤은 1953년과 1963년에 도굴당하여, 내부를 조사한 결과 굴식돌방무덤(횡혈식석실묘) 임을 확인하였다.

경앙사는 오진영 선생의 문인들이 조선 후기 대표적인 성리학자인 노주 오희상을 비롯해 간재 전우, 석농 오진영 선생의 학덕과 절개를 기리기 위해 위패를 봉안하고 제향을 올리는 사당이다. 매년 음력 3월 10일 제사를 지내고 있다. 건물은 총 26㎡(8평)로 겹처마 맞배지붕의 한옥이며, 홍살문, 삼문, 사당 등이 차례로 배치되어 있다.

경주 동궁과 월지는 신라 왕궁의 별궁 터이다. 다른 부속건물들과 함께 왕자가 거처하는 동궁으로 사용되면서, 나라의 경사가 있을 때나 귀한 손님을 맞을 때 이곳에서 연회를 베푼 장소이다.
금강산 건봉사는 금강산 줄기가 시작되는 감로봉 동남쪽 자락에 자리한 오래된 사찰로, 석가모니의 치아 진신 사리를 모시고 있다. 한때 3,183칸에 달하는 대규모 사찰이었으나 한국전쟁 때 불이문만 남기고 모두 사라졌다. 1994년부터 복원 작업을 시작하여 현재의 모습에 이르렀다. 임진왜란 때 승려들이 승병을 조직한 곳이자 일제강점기 때 항일독립운동의 중심지로 자리매김한 호국사찰이기도 하다.

경주 남산 서쪽에 있는 포석정은 왕이 술을 들면서 즐길 수 있도록 마련된 별궁의 하나였으나, 현재 정자는 없고 풍류를 즐기던 물길만이 남아있다. 조성연대는 신라 제49대 헌강왕(875~886) 때로 본다. 규모는 폭이 약 35㎝, 깊이 평균 26㎝, 전체 길이가 약 10m이다. 포석정은 중국 고대 강가에서 초혼제를 지내고 악귀를 쫓는 행사의 하나인 유상곡수연에서 유래하였다.

석빙고는 얼음을 넣어두던 창고로, 이 석빙고는 경주 반월성 안의 북쪽 성루 위에 남북으로 길게 자리하고 있다. 남쪽에 마련된 출입구를 들어가면 계단을 통하여 밑으로 내려가게 되어 있다. 안으로 들어갈수록 바닥은 경사를 지어 물이 흘러 배수가 될 수 있게 만들었다. 지붕은 반원형이며 3곳에 환기통을 마련하여 바깥공기와 통하게 하였다.

경주시 충효동 옥녀봉 능선에 위치한 김유신 장군의 묘로 674년(문무왕 14) 축조되었다. 김유신은 신라의 장군이자 재상으로 삼국을 통일한 공로가 컸으므로 문무왕은 비단 1,000필, 벼 2,000석을 내리고 군악고취 100명을 보내어 장사를 지내게 하며 비를 세워 공적을 새겨두고 수묘하는 백성을 배정해 주는 등 최고의 예를 베풀었다. 후에 흥덕왕대에 그를 흥무대왕으로 추봉하였다.

구 강경노동조합은 1925년에 건립된 근대 건축물이다. 강경은 금강을 거쳐 서해와 연결되고, 내륙으로도 접근하기 쉬워 일찍부터 상권이 발달한 도시이다. 그러한 이유로 강경시장은 평양, 대구와 함께 전국 3대 시장으로 손꼽혔으며, 강경포구는 원산포구와 함께 전국 2대 포구로 불릴 만큼 각종 해산물과 공산품의 거래 및 이동이 활발했다. 일제강점기에는 수탈의 창구로써 1920년대에 이르러 내륙의 수산물 유통은 대부분 강경포구를 거쳐 전국으로 운송될 만큼 번성하였다.

강경 중앙초등학교 강당은 1930년대에 붉은 벽돌을 쌓아서 만든 건축물이다. 강경중앙초등학교는 논산에서 가장 먼저 세워진 학교이자 졸업생 기수로 충남에서 가장 오래된 학교이다. 1905년 4월 2일에 2년제 사립학교인 보명학교로 개교한 이래, 1907년 4년제 강경공립보통학교, 1938년 강경중정공립심상소학교, 1941년 강경중정공립국민학교, 1946년 강경중앙초등학교로 여러 차례 학교 이름을 바꾸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강경 구 연수당 건재 약방은 1920년대 강경시장 전경 사진 중에 현존하는 유일한 건물이다. 강경의 하시장(下市場)을 중심으로 했던 번성시기에 시장 중심에 위치하여 호황을 누리기도 했다. 건축당시 ‘남일당(南一堂) 한약방’으로 사용되었으며, 이후 건축주가 바뀌면서 ‘연수당 건재 대약방(延壽堂 乾材 大藥房)’으로 상호를 변경하여 운영되었고, 현재는 후손이 관리하고 있다. 이 건물은 근대 한옥 변천사적으로 가치가 높다.

함양의 중심에 위치한 개평한옥마을은 좌안동 우함양이라 불릴 정도로 많은 유학자들 배출한 영남지역의 대표적인 선비마을로 조선조 오현 중 한 분인 일두 정여창 선생의 고향이기도 하다. 하동 정씨와 풍천 노씨, 그리고 초계 정씨 3개 가문이 오래도록 뿌리를 내리고 살아오면서 마을을 이루고 있으며, 일두 정여창 선생, 옥계 노진 선생 등 역사적 위상이 높은 선생을 배출하였다.
학이 둥지를 튼다는 송학산에 자리 잡은 제천의 강천사는 송학산 정상 바로 아래에 자리하였으며 천혜의 비경을 품은 명당으로 한번 가본 사람은 산사에서 바라보는 절경에 감탄을 금치 못한다. 송학초등학교에서 가파른 산길을 오르다 보면 오른쪽으로 소악사지가 나오며 그 위에 강천사가 자리하고 있다.
거동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0교구 본사인 은해사의 말사로 보현산에 위치해 있다. 신라 시대 의상대사(625~702)이 창건하였다 하며, 창건 이후 자세한 연혁은 전하지 않는다. 현재 거동사 주변에는 사찰 흔적들이 남아 있어 과거에 매우 큰 사찰이었음을 알 수 있다. 경내 현존하는 건물로는 대웅전과 2동의 요사, 산신각이 있다. 거동사 대웅전은 석가모니를 모시는 건물로 옛 건축양식을 지니고 있다.

감천사는 극심한 가뭄에도 물이 마르지 않고 지하 암반에서 1년 내내 물이 솟아올라 인근 주민들의 식수로 사용하였다는 설이 있는 곳이다. 감천사는 부산 연제구 연산동 묘봉산 자락에 위치한 자그마한 비구니 스님의 수행도량이다. 연제구의 주산인 배산 서쪽 묘봉산의 완만한 능선을 배경으로 자리하고 있는 이곳은 중생들의 목마른 갈증을 해소하기 위한 원력으로 창건된 탓에 연산동 주거단지에서 그리 멀지 않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감응사는 신라 애장왕(재위 800~808) 3년에 건립한 사찰이다. 국가민속문화유산로 지정되어 있는 성주 한개마을의 뒤쪽 영취산 중턱에 위치하고 있다. 사찰의 창건과 관련해서 창건 설화가 전해지고 있는데, 이에 따르면 신라 제40대 애장왕이 늘그막에 왕자를 낳았는데 날 때부터 눈이 나빠 앞을 볼 수 없었다.
가섭사는 석가모니의 10대 제자 중 하나인 가섭존자의 이름을 딴 고려 후기의 사찰이다. 가섭존자는 두타행을 가장 충실히 실천하였고, 영취산에서 석가모니 부처가 연꽃을 들어 그 의미를 물었을 때 유일하게 미소로 답하여 염화미소의 가르침을 전한 인물이다. 가섭사는 창건 사실을 기록한 문헌 기록과 관련 유물이 현존하지 않으며, 다만 조선시대의 기록이 남아 있어 그 실상을 추정할 뿐이다.
가산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5교구 본사인 법주사의 말사이다. 임진왜란 때 의병과 의승군이 활동했던 사찰 가산사는 신라시대 때 창건된 것으로 전해진다. 가산사는 임진왜란 당시 풍전등화와 같은 민족을 구하기 위해 많은 의승군과 의병이 훈련했던 호국정신이 깃들어 있는 곳이다. 임진왜란 당시 활약했던 의병장들로는 곽재우, 고경명, 정문부, 조헌 등이 있고, 의승군으로는 서산, 사명, 영규, 처영, 신열, 법정 스님 등이 있다.

1866년 프랑스인 성직자 9명을 처형한 책임을 물어 프랑스 함대가 갑곶 돈대로 상륙했다. 이로 인해 강화 지방에서는 혹독한 박해가 시작됐고 갑곶 성지가 보이는 백사장에서 많은 신자가 순교했다. 또 1871년에는 미국 군함에 다녀왔다는 죄로 우윤집, 최순복, 박상손 등이 갑곶 진두에서 순교했다. 후에 천주교 인천 교구는 갑곶 진두의 정확한 위치를 찾아 지금의 갑곶 순교성지를 조성하고 2004년 2월 10일 갑곶 순교성지 첫 미사를 드렸다.

오상리 고인돌군에서는 모두 12기의 고인돌이 분포하고 있는데, 2000년 실시된 발굴조사에 의하면 모두 북방식 고인돌이라 한다. 이 지역의 고인돌은 덮개돌은 부분적으로 손질한 흔적이 있고, 평면 형태는 모두 판돌형(板石形)이다. 덮개돌의 크기는 기념물로 지정된 내가 고인돌이 가장 크고 나머지는 길이가 다양한 편이다. 돌방(石室)은 돌널형태의 모습이고, 고임돌이나 막음돌을 세울 때 튼튼하게 하기 위하여 주변에 쐐기돌을 사용하였다.
대한불교조계종 소속 사찰인 거조사는 738년(신라 효성왕 2) 원참(元旵)법사가 창건했다는 설과 경덕왕 때 왕명으로 창건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그 뒤 진평왕 13년 혜림법사와 법화화상이 영산전을 건립하여 오백나한을 모신 영험 있는 도량으로 유명해졌다. 상언이 그린 영산회상도와 청화화상이 자연석을 이용해 조성한 석가모니부처님, 제화갈라보살, 마륵보살님과 비롯한 526분의 나한성중이 봉안되어 있다.

개덕사는 충남 금산군 추부면에 있다. 서대산 기슭에 터를 잡은 이곳은 자세한 기록은 전하고 있지 않지만, 고려시대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한다. 개덕사 인근 절터에서 고려시대 것으로 보이는 기와 조각이 출토됐기 때문이다. 사찰에서는 서대폭포 혹은 개덕폭포라 불리는 폭포를 비롯해 대웅전, 산신각 등을 볼 수 있다. 사찰 주변에는 서대산드림리조트가 있다.

양산팔경 중 가장 아름답다고 손꼽히는 곳이 바로 강선대이다. 강선대는 유유히 흐르는 금강가에 우뚝 솟은 바위 위에 오롯이 서 있는 육각 정자로 멀리서 보면 주변 노송들과 어울려 우아하고 고상한 멋이 흐른다. 정자 위에 서면 푸른 강물이 거칠게 부딪치는 바위 절벽이 아찔하다. 강선대는 물과 바위와 소나무가 어울려 삼합을 이룬 곳이라고도 한다. 양기(陽氣) 강한 바위와 음기(陰氣)의 물을 소나무가 연결해 주는 역할을 하고 있어서다.

감추사는 동해시 용정동에 위치한 작은 절이다. 영동선의 철길을 건너 옥석정이라는 정자를 지나고 나서 계단을 내려오면 기도도량 옆에 석굴과 감추사가 있다. 건물은 4채밖에 없지만, 저마다 바위 틈새에 교묘하게 들어앉아 있어 각각 멋진 모습을 내비친다.
강릉 오금집은 강릉시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는 유일한 초가집으로, 조선 후기에 지어진 것이다. 집의 구조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작은 겹집이다. 왼쪽으로 2개의 방이 있으며, 오른쪽으로 부엌이 있다. 겹집양식으로 뒤쪽에 안방과 골방을 배치하였고, 앞쪽에는 툇마루가 있다. 네 귀퉁이에 있는 기둥은 안으로 기울어지도록 세웠으며, 못을 사용하지 않고 이음·새끼줄 등을 이용하였다. 특히 부엌 쪽은 초가지붕이 땅 가까이까지 내려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