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원사(보성)
대화사는 신라 지증왕 때에 아도화상이 창건했으며, 그 후로 고려시대 조계 제5세 원오국사가 중건하였다. 대원사는 천봉산 중턱에 있으며 6·25 동란 이전까지만 해도 10여 동의 건물이 있었으나 여순반란 사건 때에 대부분의 건물이 불타버렸다. 근처에 백민 미술관, 송재 서재필 생가 및 기념공원, 주암호반, 고인돌 공원과 연계되는 교육문화 탐방 루트로 연중 관광객이 끊이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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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사는 신라 지증왕 때에 아도화상이 창건했으며, 그 후로 고려시대 조계 제5세 원오국사가 중건하였다. 대원사는 천봉산 중턱에 있으며 6·25 동란 이전까지만 해도 10여 동의 건물이 있었으나 여순반란 사건 때에 대부분의 건물이 불타버렸다. 근처에 백민 미술관, 송재 서재필 생가 및 기념공원, 주암호반, 고인돌 공원과 연계되는 교육문화 탐방 루트로 연중 관광객이 끊이지 않고 있다.

지리산의 천왕봉 동쪽 아래에 신라 제 24대 진흥왕 9년(548년)에 연기조사가 창건하여 평원사라고 했다. 그 뒤 1 천여 년 동안 폐쇄되었던 것을 조선조 숙종 11년에 운권선사가 문도들을 데려와 평원사의 옛 절에 사찰을 건립, 대원암이라 개창하고 선불간경도량을 개설하여 영남의 강당이 되었다. 조선조 고종 27년에 혜흔선사의 암자가 무너져 크게 증건하였다.
대성사는 한국불교 태고종에 소속되어 있는 사찰이다. 옥천에는 전통사찰로 등록된 대성사가 2군데 있다. 이원면에 위치한 대성사와 옥천읍 교동리에 위치한 대성사인데 모두 태고종에 소속되어 있는 사찰이다. 그러나 이 두 사찰은 그 사찰의 경영에 있어 매우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원면에 있는 대성사는 민가에 둘러싸여 있으나 한가하고 여유로우며, 찾는 이가 그리 많지 않은 조용한 도량이다.
옥천군에는 대성사라는 사명을 가진 사찰이 두 곳이 있다. 이곳은 옥천읍에 위치한 대성사로 대중들에게 적극적으로 다가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하며 실천불교를 표방하는 사찰이다. 대성사에는 충청북도 문화유산자료로 지정되어 있는 옥천 대성사 석조여래입상이 있다. 대성사가 있는 청성면 도장리(道場里)는 ‘불당골(佛堂谷)’로도 불리는 것으로 보아 불교와 관련된 지역임을 알 수 있다.

기록상 마라난타가 백제로 오는 동안 풍토병으로 고생을 하였는데, 우면산 물을 마시고 완쾌하였다고 한다. 이에 우면산에 대성초당을 짓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대성사의 전신이라 전해진다. 또한 3. 1독립운동 민족대표 33명 중 한분이신 백용성 스님께서 주석하시며 불교 대표로 참가하시어 대승적 독립운동을 전개하셨다. 현재 대성사에는 백용성 스님이 조성하신 목불좌상(서울특별시 유형문화유산)이 모셔져 있다.

대성산지구전투전적비는 6·25 전쟁 중 대성산지구 전투에서 활약한 장병들의 전공을 기리고, 나라를 위해 희생한 호국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기념비이다. 이 비는 1983년 10월 1일 화천군에 위치한 육군 제8305부대에서 건립했으며, 현재는 보병 제15사단에서 관리하고 있다. 대성산지구 전투는 1951년 6월 9일 국군 제2사단 제2·3대대가 1041 고지 일대의 중공군 병력을 섬멸하기 위해 벌인 전투였다.

대승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8교구 본사인 직지사의 말사이다. 1644년(인조 22)과 1722년(경종 2)에 의현, 종수 등이 중수하였고, 1831년(순종 31) 구담이 중창하였다. 1922년 큰 화재로 불타 의운, 덕산이 복원시켰는데, 1956년 또다시 큰 화재가 발생하여 명부전과 극락전만 남고 소실되어, 1960년 남인 대휴 등에 의해 삼창 되었다.
대비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9교구 본사 동화사 소속 사찰로 신라 시대 6세기경에 청도 호거산 운문사를 중심으로 한 다섯 갑사 중 하나로 세워진 소작갑사(小鵲岬寺)가 전신이다. 대비사는 대비갑사(大悲岬寺)로도 불리는데, 고려 때 지금의 자리로 옮겨와 오늘에 이르고 있다.

대법사는 대포산 기슭에 위치한 사찰로 명성황후의 출생 일화가 전해진다. 고즈넉한 사찰 곳곳에 심어진 꽃나무와 연지가 있어 아름다운 경관을 감상할 수 있다. 대법사는 1971년에 창건됐으며 역사가 오래되지 않은 사찰이다. 하지만 원래 이곳은 창건 시기는 정확하지 않으나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진성여왕 때부터 절이 있었다고 전한다. 창건 당시 0. 9m의 미륵입상을 조성해 미륵당으로 불렸다고 한다.

순창 대모암은 백제 시대의 산성터인 순창 대모산성 북쪽에 자리한 사찰이다. 학성이 1933년 창건한 곳으로, 6·25 전쟁 때 거의 폐사되다시피 했다가, 1973년 법당을 중수하였으며 1985년 범종각을 지었다. 1993년에는 대웅전을 새로 지었다. 대모암은 대웅전, 범종각, 요사채 2동으로 구성되어 있다. 대웅전은 팔작지붕에 정면 3칸, 측면 2칸의 목조 건물이다.

구미 대둔사는 건축기법와 양식으로 보아 조선 후기인 17세기에 세운 것으로 추정되며 석가여래좌상을 본존불로 모시고 있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대웅전과 명부전, 응진전, 삼성각 그리고 3동의 요사가 있고, 조선 후기 사찰 건축의 연구에 중요한 자료인 대웅전과 대웅전 내부에 있는 건칠아미타여래좌상이 있다. 신라 눌지왕 30년(446) 아도화상이 세웠다는 설이 있으나,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다.
암각화란 선사시대 사람들이 바위나 동굴벽에 기호나 물건, 동물 등의 그림을 새겨놓은 것을 말하는데, 주로 농사의 풍요와 생산의 의미를 지니는 주술행위의 결과물로 보인다. 대곡리암각화는 봉황대로 불리는 구릉의 정상 부근 암벽에 새긴 것으로, 호남지방에서 유일한 선사시대의 암각화이다. 암각화는 두 곳에 위치하고 있는데, 크기는 1∼2m 내외이며, 상하 혹은 좌우 대칭으로 기하학적인 문양을 새겼다.

1930년에 창원특례시 진해구 화천동에 시중 포교당으로 출발하였다. 1950년대에는 주지 무상스님과 신도 이장술, 팽무진상 등이 여좌동으로 이전하여 법당, 칠성각, 요사채 등을 건립하였고, 1980년 마진터널이 개설되면서 주지 운성스님과 신도 허대근 등은 태백동으로 이전하여 법당, 회관, 요사채, 유치원 등을 건립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대각서원은 1610년(광해군 2) 지방 유림의 공의로 하항, 손천우, 김대명, 하응도, 이정, 유종지, 하수일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선현 배향과 지방 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오던 중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1869년(고종 6)에 훼철되었다가 1947년 지방 유림에 의하여 복원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문강공 은봉 안방준(1573~1654)은 호남을 대표하는 유학자로서, 20세에 임진왜란이 일어나 박광전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고,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에도 격문을 띄워 근왕의 의기를 높이 세웠다. 대계서원은 효종 8년(1657) 지방유림의 공의로 안방준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향교는 공자와 여러 성현께 제사를 지내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해 나라에서 세운 교육기관이다. 당진향교는 조선 태조 7년(1398)이나 태종 7년(1407)에 지은 것으로 전하고 있다. 현재 남아 있는 건물로는 제사 공간인 대성전, 교육 공간인 명륜당, 학생들의 기숙사인 동재와 서재, 삼문, 제기고 등이 있다. 대성전 안쪽에는 공자를 비롯한 중국과 우리나라 성현들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대각사는 부산 시내 중심가에 있는 사찰로써, 개항기 일본 정토 진종의 동원본사 부산별원으로 시작하였다. 동원본사 부산별원은 개항기 일본 불교의 조선 포교의 효시로서, 당시 부산에서 신도수가 가장 많았던 일본인 사찰이었다. 해방 후 동본원사 부산별원은 한국 정부에 귀속되었는데, 정부 관제국에서 귀속재산 처분을 할 때 이 사찰의 땅과 건물을 경매받아 경남 불교종무원으로 발족하였다가 창건주에 의해 새로이 한국 사찰로 창건한 것이 현재 대각사이다.

향교는 지방에 설립한 국립교육기관으로서,성현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기능과 학생을 교육하는 강학 기능을 동시에 담당하였다. 1400년에 불타자 곧 재건하였고 임진왜란 때 다시 소실되어 1599년(선조 32) 현재의 달성공원 부근에 재건하였다. 1605년 교동으로 이건하여 명륜당을 중건하였으며, 1932년 현 위치로 이건 하였다.

대곡사는 비봉산(579m) 동쪽 자락에 위치한 고려시대 사찰이다. 고려 공민왕 17년(1368년)에 왕사인 지공선사와 나옹선사가 창건했다. 창건 당시에는 대국사(大國寺)라 하였는데, 이는 지공이 중국 원(元)과 고려 두 나라를 다니면서 불법을 편 것을 기념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그러나 1960년 대곡사 탑 밭에서 출토된 통일신라시대의 보살상을 볼 때 그 이전에 이미 창건되어 있었다고 보아야 할 듯하다.

통영시 산양읍 삼덕리의 야산 정상부와 구릉의 경사면을 이용하여 돌로 쌓은 산성으로, 고려 공민왕 23년(1374) 왜구의 침략을 막기 위해 최영 장군이 병사와 많은 백성을 이끌고 성을 쌓아 왜구를 물리친 곳이라 전한다.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 때 왜구에 의해 당포성이 점령당하였으나 이순신 장군에 의해 다시 탈환되었는데, 이것이 유명한 당포승첩이다.

면천읍성은 당진시 면천읍 소재지에 남아있는 평지 읍성으로 당진, 서산, 태안 등과 더불어 옛부터 중국으로 통하는 바닷길이 있었던 곳이다. 이처럼 중국과의 통상에 중요한 통로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국방상의 중요한 거점이기도 해서 백제시대부터 중요한 거점으로 취급되었다. 지금의 읍성이 세워진 것은 1439년(세종 21년)으로 조선 후기까지 면천의 군사 및 행정중심지의 기능을 수행하였다.

한강, 그리고 강 건너 남산을 바라보는 서달산 중턱에 작은 사찰이 있다. 낮이면 흐르는 강물을 멀리서 지켜볼 수 있고, 밤이면 작은 불빛을 발하는 남산의 정경을 바라볼 수 있는 열린 사찰이다. 서달산을 남산으로 자연과 함께하는 맑은 도량으로 알려져 있는 곳으로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도심 속에서 찌든 혼탁한 마음을 바로 세울 수 있는 도심 속 전통사찰이다.

충주 단호사는 한국불교 태고종의 말사로 조선 후기 숙종 때 중건한 사찰이다. 중건 당시 ‘약사’라 하였고, 1954년 단호사로 개칭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3칸의 맞배집인 대웅전과 약사전, 용왕전, 요사채 등이 있다. 약사전 내에는 1976년 보물로 지정된 철불여래좌상이 봉안되어 있다. 11세기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불상으로 고려 시대 철불의 귀중한 유품이며, 지역적인 유파성을 연구하는 데 도움이 된다.

사직은 토지를 관장하는 사신과 곡식을 주관하는 직신을 가리키며, 두 신을 제사 지내는 단을 만들어 모신 곳이 사직단이다. 토지를 주관하는 사신과 오곡을 주관하는 직신에게 고을의 백성이 편안하게 살 수 있도록 풍요를 기원하는 제사를 지내는 제단으로, 매년 중춘과 중추에 사직제를 지내고 나라의 큰일이나 가뭄이 있을 때에는 기우제를 지내기도 하였다.

달성 하목정은 임진왜란 때 의병장이었던 낙포(洛浦) 이종문(李宗文)이 1604년(선조 37)에 세운 것이다. ‘하목정’이라는 정호(亭號)는 인조가 왕위에 오르기 전에 이곳에 머문 적이 있어 그 인연으로 이종문의 장남인 이지영에게 직접 써 준 것이다. 이곳은 조선 중기에 건립된 평면형태가 독특한 정자형 별당 건축으로 공간구성과 세부기법 및 의장 등에는 많은 특색이 나타나고 있어 역사적, 건축적, 학술적 가치가 뛰어난 곳이다.

현풍석빙고는 얼음을 저장하기 위해 돌을 쌓아 만든 창고이다. 남북으로 길게 축조되어 있으며, 출입구가 개울을 등진 능선 쪽에 마련된 남향구조이다. 돌의 재질은 모두 화강암으로 외부에서 보면 고분처럼 보인다. 입구는 길쭉한 돌을 다듬어 사각의 문틀을 만든 후 외부공기를 막기 위해 돌로 뒷벽을 채웠다. 외부는 돌을 쌓고 점토로 다져서 흙을 쌓아 올렸다.

성가정 성지는 1866년 병인박해 때 남한산성에서 순교하신 정은 바오로의 시신이 안장된 곳이다. 성지 개발 위원회에서는 순교자 정은과 그 가족들의 순교 정신을 현양하고 기리기 위해 이곳을 개발하고, 1987년 9월 15일에 수원교구장 김남수 안젤로 주교님의 집전으로 축성하였다. 오솔길을 따라 들어오면 오래된 수도원 같은 느낌의 성지가 나타난다. 앞으로는 수량이 풍부한 시냇물이 흐르고 뒤로는 울창한 숲의 와룡산이 감싸고 있다.
충청북도 단양군 단양읍 도담리(嶋潭里) 남한강가에 있는 석기시대 및 청동기시대 동굴유적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구석기 문화 유적으로 전기구석기부터 청동기시대에 이르는 거의 모든 시기의 유물층이 발견되어 각 문화층의 성격을 찾아볼 수 있다. 1980년 충주댐 건설로 인한 수몰지역에 실시된 문화유적 지표조사에서 구석기시대의 동굴유적임이 확인되었다.

단구서원은 문희공 이세기 선생을 주벽으로 하고, 문효공 이천 선생, 송와공 이종윤을 배향하는 서원이다. 원래 송와공을 제향 하는 모현서당이 철종 13년(1862)에 건립되었는데, 고종 5년(1868)에 훼철되어 1983년에 단구서원을 창건하였다. 이세기는 고려 충렬왕 때 명신으로 문장에 능하였으며, 밀직부사, 예문관대제학, 동지춘추관사, 검교정승 등을 역임하였다.
단양향교는 1415년 창건된 후 퇴계 이황 선생이 현 위치인 단양 단성면 상방리로 이건한 향교이다. 향교는 훌륭한 유학자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며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해 설립된 고려, 조선시대의 국립 교육기관으로 갑오개혁 이후 교육적 기능은 사라졌다. 영조 때 두 차례 낡은 부분을 손질하였으며, 정조 때 군수 조경진이 명륜당을 고쳐지었다. 1971년과 1977에도 각각 낡은 부분을 손질하여 고쳤다.
단양 조덕수 고택은 남한강이 굽이쳐 흐르는 가곡면의 상덕천 마을, 해발 200m의 얕은 산자락(국수봉)에 있는 목조기와집으로, 조자형 가옥으로도 불린다. 조자형의 6 대조인 조덕수가 1770년경에 지었다고 전해온다. 이 지역의 중농의 생활상을 잘 보여주는 민가이다. ‘ㄱ’ 자형의 안채와 ‘ㄴ’ 자형의 행랑채가 맞물려 ‘ㅁ’ 자 모양을 이루는 전형적인 중부 내륙 지방의 민가 형식의 가옥이다.
단양적성은 충청북도 단양군 단성면 하방리 성재산 정상에 있는 돌로 쌓아 만든 산성이다. 단양적성은 석축성으로 성의 길이가 923m이지만 대부분 붕괴되었고 북동쪽 내외 부분의 안쪽 벽 높이 2~3m, 폭 1m의 석축이 일부만 남아 있다. 성재산 봉우리와 남쪽 비탈을 빙 둘러쌓은 테뫼식 산성이며 성문 자리는 남서쪽, 동쪽, 남동쪽 등 세 곳에서 발견되었다.
신라말의 학자이며 문장가인 최치원(857∼?)이 지은 정자로, 은거 생활을 하던 당시에 글을 읽거나 바둑을 두며 휴식처로 삼았던 곳이다. 최치원은 신라의 유교학자들 중에서 대표적인 인물이다. 당나라로 유학을 가서 과거에 급제한 후, 중국에서 황소의 난이 일어나자 「토황소격문」이라는 글을 써서 이름을 날렸다. 귀국 후 정치개혁을 위해 노력을 기울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관직을 떠나 가야산에 은거하면서 여생을 보냈다.

논산 연산역 급수탑은 1911년 호남선의 개통과 함께 증기기관차의 물을 공급하기 위해 같은 해 12월 30일에 설치되어 1970년대까지 약 60여 년간 사용되었다. 현재 남아있는 급수탑 가운데 연대가 가장 오래되었다. 열차의 발전과 함께 기능을 상실한 채 남아있던 이 급수탑은 근대 산업시설물로의 역사성과 희소한 조형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전체 높이는 16. 2m, 지면부의 바깥지름은 5. 28m이며, 최상단부 철제 물탱크의 바깥지름이 4.

정읍시 태인면 소재지에서 있는 항가산을 올라가면 중턱에 다천사가 있다. 500년이 넘는 느티나무가 있는 다천사는 옛날 절이 있던 자리라고 하는데 벽산스님이 1930년경 이 절을 창건했다. 항가산은 불교적 향기가 가득한 곳으로 항가산이라는 이름은 항하사의 항 자에다, 석가모니의 가 자를 합쳐 만들어진 산이다. 그 뜻은 수 많은 모래와 같이 부처님이 많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한편 다천사라는 이름은 차를 끓여도 좋을 만큼 맑은 물이 있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노태우 대통령 생가는 대구 동구 신용동 팔공산 기슭에 자리 잡고 있다. 신용동이란 명칭은 신령스러운 용이 하늘로 올라간 용지가 있다고 하여 이름 붙여졌다. 신용동에 위치한 용진마을에 가면 노태우 대통령 생가가 있다. ‘용의 머리’에 자리한 명당이라 하며, 안채와 사랑채, 외양간 등이 소박한 모습으로 남아 있어 살아있는 역사 교육 현장으로 이용되고 있다. 용진마을은 교하 노 씨의 집성촌이기도 하다. 마을 주변은 봄철이면 복사꽃이 만발해 장관을 연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