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원서원
덕원서원은 세조(재위 1455~1468) 때 이시애의 난을 맞아 당시 선봉장으로 활약하다가 장렬히 전사한 강열공 차운력, 문절공 차원부, 문목공 차포온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덕원서원은 숙종 18년(1692) 세웠는데, 처음에는 호남 승평에 세워 오천서원이라 했다. 그 뒤 지방 유림이 순조 6년(1806)에 청덕면 성태리로 옮겨지어 덕원서원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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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원서원은 세조(재위 1455~1468) 때 이시애의 난을 맞아 당시 선봉장으로 활약하다가 장렬히 전사한 강열공 차운력, 문절공 차원부, 문목공 차포온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덕원서원은 숙종 18년(1692) 세웠는데, 처음에는 호남 승평에 세워 오천서원이라 했다. 그 뒤 지방 유림이 순조 6년(1806)에 청덕면 성태리로 옮겨지어 덕원서원이라 하였다.

덕양서원은 1625년(인조 3) 백촌 김문기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세웠다. 김문기는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형조참판·공조판서 등을 역임하였고, 1456년(세조 2) 사육신에 연루되어 처형되었다. 1868년(고종 5)에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48년 지방의 유학자들에 의해 복원되었다. 경내의 대표적인 건물로는 상충사, 경의당 등이 있다. 상충사에는 김문기의 위패를 모시고 있고, 경의당은 유학을 공부하는 강당이다.

이 서원은 경산이씨(京山李氏)의 3현(賢) 삼익재(三益齋) 이천배(李天培)·백천(白川) 이천봉(李天封)·학가재(學稼齋) 이주(李)를 존모(尊慕)하여 현종 13년(1672)에 사림에서 덕암사(德巖祠)를 건립한 것에서 연유한다. 이후 흥선대원군의 서원훼철령에 의해 훼철되었다가 고종 13년(1876) 덕암서당(德巖書堂)으로 중건하였다. 지금의 서원 명칭은 1998년 정부와 경상북도의 지원을 받아 묘우(廟宇), 내삼문, 동·서재 등을 건립하여 이듬해에 개칭한 것이다.
서원은 조선 중기 이후에 학문을 연구하고 훌륭한 유학자의 제사를 지내기 위하여 지역 사림에 의해 설립된 사설 교육 기관이다. 임실군 지사면에 있는 덕암서원은 1863년에 건립되었으며, 포은 정몽주를 주벽으로 최양을 배향하다가 1821년(순조 21) 정지년을 추배 하였으며, 1829년(순조 29)에 이르러 박종수를 다시 추배 하였다. 그 뒤 고종 5년(1868) 대원군의 전국 서원 철폐령에 의해 훼철되었다가 1965년 복설 되었다.

향교는 훌륭한 유학자의 제사를 지내고 지역민을 교육하기 위하여 설립한 고려·조선시대의 국립 지방 교육기관이다. 조선시대에는 국가로부터 토지와 노비 등을 지급받아 교관이 교생을 가르쳤으나, 1894년 갑오개혁으로 근대 교육이 본격화되면서 교육적 기능은 폐지되었다. 대성전은 숙종 8년에 수리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며 1987년에 다시 한번 보수했다.
대한문(大漢門)은 덕수궁의 정문으로 ‘대한’은 “한양이 창대해진다”라는 뜻이다. 원래 경운궁의 정문은 남쪽에 있었던 인화문(仁化門)이었으나, 동문인 대안문(大安門) 주변이 환구단을 비롯하여 새로운 도심의 역할을 하게 되면서 정문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 지금의 이름은 1906년(광무 10) 문을 수리하면서 바꾸게 되었다. 원래 대한문은 약 33m 앞에 있었으나 1970년대 태평로를 확장하면서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
덕산사는 657년 무염(無染) 국사가 창건하였다. 본래 덕산사라는 이름으로 창건되었으나 1609년에 화재로 인하여 소실되고 수백 년 동안 절터만 남아 있었는데 1959년 원경스님이 절을 다시 세우며 내원사로 이름을 바꾸었다.

덕산서원은 고성 IC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는 서원으로 1979년 이학도 선생이 선조들의 위패를 모시기 위해 부지 3만 3,000㎡에 조성하였다. 덕산서원에는 정면 4칸, 측면 1칸 규모의 서원 건물과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된 덕산정, 팔각정, 관리사 등이 있다. 봄철 벚꽃 놀이를 비롯하여 사철 아름다운 경관을 보기 위해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곳이다. 덕산서원 인근에는 고성마동호습지, 당항포만, 예진벌레잡이식물원 등 많은 관광지가 있는 곳이다.

덕산서원은 경상북도 영주시 부석면에 있는 서원으로, 최효원과 최장간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했다. 1894년(고종 31)에 금릉과 선산 지역 유림들의 공론으로 최효원(1742∼1795)과 최장간(1763∼1812) 2인을 향사하기 위해 덕산서원을 세우기로 결의하였지만 창건하던 중에 동학농민전쟁이 일어나 이를 피해 현재 위치로 이건 하였다. 1972년 영주와 봉화 유림들의 동의를 얻어 영주시 부석면 상석리에 건립하였고, 1977년에 중건하였다.

이 서원은 조선조 초기 문신으로 대쪽 같은 절개를 지켰던 남은(南隱) 서섭(徐涉)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첨모재(瞻慕齋)를 1993년 서원으로 복설(復設) 한 것이다. 서섭은 달성서 씨 판서공파 파조(派祖)로 세종 때 대과에 급제한 후 단종 때 이조판서를 지낸 인물인데 세조의 왕위 찬탈로 관직을 사직하고 낙향하여 남애(南涯)라는 호를 남은(南隱)으로 고치고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은둔하였다.

조선 숙종 때의 문신으로 기사사화(己巳士禍)에 연루되어 유배 도중 세상을 떠난 오두인(吳斗寅, 1624~1689)의 충절과 덕행을 기리기 위하여 숙종 21년(1695)에 건립된 서원이다. 숙종 23년에 임금이 ‘덕봉’이라는 현판을 하사하여 공인과 지원을 받게 되었다. 고종 8년(1871) 서원철폐령 때에도 헐리지 않고 존속한 전국 47개 서원 가운데 하나이다.

대촌마을은 섬진강과 가깝고 역사가 오래된 유서 깊은 마을이다. 금석 병용 시기인 청동기시대에 형성된 마을로 임진왜란 이후 대촌마을로 명명된 것으로 추정된다. 지리산 둘레길 원부춘-가탄 구간에 있으며 하동 최 참판 댁과 가깝다. 최근 대촌마을에선 빈 창고를 개조해 ‘대촌 광장’이라는 이름의 공간을 열고 주민과 여행객의 소통 공간으로 활용하고 있으며 이곳에서 어르신들이 만든 소품과 하동을 나타내는 배지 등 기념품도 판매한다.

덕림서원은 1740년(영조 16년)에 지방 유림의 공의로 오방우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오방우(1313~1393)는 고려 말기의 문신으로, 고려 충목왕 때 예부시에 급제하고 공민왕 때 오도안렴사를 지낸 해주오씨 장기 입향조이다. 덕림서원은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오던 중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년)에 훼철되었으며, 그 뒤 복원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대포서원은 경기도 김포시 양촌읍 야산에 위치하였으며, 조선 전기의 대학자이자 문신인 눌재 양성지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양성지는 공조판서, 대사헌을 거쳐 홍문관 대제학 등을 역임한 당애 최고의 문장가이자 사상가로 세종부터 성종까지 여섯 임금을 섬기며 경륜 있는 정치가로 활약하였다. 조선 시대 책 동문선, 고려사, 고려사절요, 동국통감 등의 편찬에 기여했으며, 지리와 지도 전문가로도 뚜렷한 족적을 남겼고, 홍문관과 규장각의 설치를 주장하기도 했다.
대천한내돌다리는 보령 시내 대천천 하류에 있었던 돌다리이자, 과거의 남포와 대천을 이어주는 중요한 교통로 역할을 했다. 세월이 흐르면서 물살에 쓸려 떠내려가거나 하천 제방공사를 하면서 파손되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1978년 수습하여 옮겨 두었다가, 1992년에 대천천 강변에 옮겨 일부 복원하면서 충청남도 유형문화유산으로 지정하였다. 거대한 화강암으로 만들었는데, 근처에 있는 왕대산의 돌을 깎아내어 뗏목으로 운반해 온 것으로 보인다.

대조사(부여)는 부여군 남부에 솟은 성흥산(260. 1m) 남쪽 자락에 위치한 사찰이다. 인근의 가림성과 마찬가지로 6세기 초에 세워져 1,500년에 가까운 역사를 자랑하는데, 높은 돌담을 쌓아 마치 산성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전설에 의하면 한 노승이 이 바위 밑에서 수도하다가 어느 날 한 마리의 큰 새가 바위 위에 앉는 것을 보고 깜빡 잠이 들었는데, 깨어나 보니 어느새 바위가 미륵보살상으로 변해있었다 하여 이 절을 대조사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대적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9교구 본사 동화사 소속 사찰로 876년 보조 선사가 토굴로 창건했다고 전한다. 고려시대에는 보양 선사가 중창했다고 하며, 조선 후기에 들어와서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1689년 서월성해 승려가 크게 중수하여 사찰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고 한다. 조선 중기 이후에 다시 지은 것으로 보이는 극락전은 불교도의 이상향인 극락정토를 표현하고 있는 법당이다.
충주 대원사는 1929년 창건된 절로 1994년 대규모의 화재로 법당일부와 철불좌상을 봉안한 보호각이 소실되어 다시 중건하였다. 대원사의 무량수전은 근래에 지은 것으로 정면 5칸, 측면 4칸의 팔작지붕 목조 기와집이다. 법당 안에는 아미타불좌상을 주존으로 좌우에는 관세음보살과 지장보살이 봉안되어 있고, 천불상과 신중탱화 및 동종이 있다. 대원사는 충주 시내에 자리한 사찰로 근처 관광지로는 택견전수관, 관아공원, 주물유기장 등이 있다.

대원사는 모악산 동쪽 기슭 해발 420m에 자리 잡고 있는 조그마한 사찰로 대한불교 조계종 제17교구 본사인 금산사의 말사이다. 고구려에서 백제로 귀화한 열반종의 개산조인 보덕의 제자들이 670년(신라 문무왕 10) 창건하였으며, 1866년(고종 23)에 중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대웅전과 원통보전·응향각·삼성각·봉익루·범종각·구요사·객실 등이 있다. 이 중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주심포계 팔작지붕 건물이다.

청도팔경의 하나인 용각산 지맥인 오례산 산정에 위치한 대운암은 1868년(고종 5년)에 부암선사가 범굴에서 수도하다 현몽에 의해 창건하였다. 1900년 화재로 소실된 것을 신범해화상이 중창하고, 경산시 자인면 반룡사에서 관세음보살불상 1구를 옮겨와서 봉안하였다.
경호강 물줄기에 자리한 이 마을은 신라 때 어느 대장이 쉬고 간 곳이라 해서 대장마을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전해진다. 마을 곳곳 담벼락에 알록달록한 벽화가 그려져 정겹다. 경호강은 겨울에 언 강이 거울처럼 맑다는 뜻인데, 경호강 북쪽은 덕유산과 지리산 자락이 병풍처럼 하늘을 가로막아 여름에 몰려오는 습한 비구름이 산자락에 부딪혀 넘어가면서 큰비를 뿌리는 지역이다.

신흥사는 대전시 유성구 원신흥동에 자리 잡고 있다. 이곳은 대한 불교 정토정 사찰이다. 정토정은 아미타불 및 그가 출현할 정토의 존재를 믿고, 죽은 후 그 정토에 태어나기를 바라는 대승불교의 일파이다. 사찰에서는 아미타불 부처님과 협시불인 관음보살님과 대세지보살님을 주불로 봉안하였으며, 104위 신중님이 봉안되어 있다.

조선 후기에 건립된 흥선대원군의 별서로 서울시 유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인왕산 바위 자락으로 둘러싸여 있는 곳으로 흥선대원군이 ‘석파정’이라 이름 지었으며 삼계동 정자라 하기도 한다. 본채 7채의 살림채와 육모정, 유수성중관풍루 등 다양한 건축물로 구성된 별서는 오늘날 안채, 사랑채, 별채와 정자로 4개의 동만 남아 있다. 아름다운 경관과 수려한 건축을 자랑하며 조상들의 풍류와 예술적 정취를 느낄 수 있다.

신라 문무왕(文武王)12년(672)에 의상대사(義湘大師)가 창건한 사찰인 청송 대전사(大典寺)는 주왕의 설화에서 주왕의 아들인 대전도군의 이름에서 유래하였다. 본래 매우 큰 절이었으나 여러 차례의 화재로 상당부분 소실되었다. 지금은 보광전을 중심으로 관음전, 명부전, 응진전, 산령각, 요사채 등이 있으며 가람의 여러 곳에 도출되어 있는 주초석들이 옛 사찰의 규모를 짐작하게 한다. 대전사의 부속암자로는 백련암과 주왕암이 있다.

대화사는 신라 지증왕 때에 아도화상이 창건했으며, 그 후로 고려시대 조계 제5세 원오국사가 중건하였다. 대원사는 천봉산 중턱에 있으며 6·25 동란 이전까지만 해도 10여 동의 건물이 있었으나 여순반란 사건 때에 대부분의 건물이 불타버렸다. 근처에 백민 미술관, 송재 서재필 생가 및 기념공원, 주암호반, 고인돌 공원과 연계되는 교육문화 탐방 루트로 연중 관광객이 끊이지 않고 있다.

지리산의 천왕봉 동쪽 아래에 신라 제 24대 진흥왕 9년(548년)에 연기조사가 창건하여 평원사라고 했다. 그 뒤 1 천여 년 동안 폐쇄되었던 것을 조선조 숙종 11년에 운권선사가 문도들을 데려와 평원사의 옛 절에 사찰을 건립, 대원암이라 개창하고 선불간경도량을 개설하여 영남의 강당이 되었다. 조선조 고종 27년에 혜흔선사의 암자가 무너져 크게 증건하였다.
대성사는 한국불교 태고종에 소속되어 있는 사찰이다. 옥천에는 전통사찰로 등록된 대성사가 2군데 있다. 이원면에 위치한 대성사와 옥천읍 교동리에 위치한 대성사인데 모두 태고종에 소속되어 있는 사찰이다. 그러나 이 두 사찰은 그 사찰의 경영에 있어 매우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원면에 있는 대성사는 민가에 둘러싸여 있으나 한가하고 여유로우며, 찾는 이가 그리 많지 않은 조용한 도량이다.
옥천군에는 대성사라는 사명을 가진 사찰이 두 곳이 있다. 이곳은 옥천읍에 위치한 대성사로 대중들에게 적극적으로 다가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하며 실천불교를 표방하는 사찰이다. 대성사에는 충청북도 문화유산자료로 지정되어 있는 옥천 대성사 석조여래입상이 있다. 대성사가 있는 청성면 도장리(道場里)는 ‘불당골(佛堂谷)’로도 불리는 것으로 보아 불교와 관련된 지역임을 알 수 있다.

기록상 마라난타가 백제로 오는 동안 풍토병으로 고생을 하였는데, 우면산 물을 마시고 완쾌하였다고 한다. 이에 우면산에 대성초당을 짓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대성사의 전신이라 전해진다. 또한 3. 1독립운동 민족대표 33명 중 한분이신 백용성 스님께서 주석하시며 불교 대표로 참가하시어 대승적 독립운동을 전개하셨다. 현재 대성사에는 백용성 스님이 조성하신 목불좌상(서울특별시 유형문화유산)이 모셔져 있다.

대성산지구전투전적비는 6·25 전쟁 중 대성산지구 전투에서 활약한 장병들의 전공을 기리고, 나라를 위해 희생한 호국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기념비이다. 이 비는 1983년 10월 1일 화천군에 위치한 육군 제8305부대에서 건립했으며, 현재는 보병 제15사단에서 관리하고 있다. 대성산지구 전투는 1951년 6월 9일 국군 제2사단 제2·3대대가 1041 고지 일대의 중공군 병력을 섬멸하기 위해 벌인 전투였다.

대승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8교구 본사인 직지사의 말사이다. 1644년(인조 22)과 1722년(경종 2)에 의현, 종수 등이 중수하였고, 1831년(순종 31) 구담이 중창하였다. 1922년 큰 화재로 불타 의운, 덕산이 복원시켰는데, 1956년 또다시 큰 화재가 발생하여 명부전과 극락전만 남고 소실되어, 1960년 남인 대휴 등에 의해 삼창 되었다.
대비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9교구 본사 동화사 소속 사찰로 신라 시대 6세기경에 청도 호거산 운문사를 중심으로 한 다섯 갑사 중 하나로 세워진 소작갑사(小鵲岬寺)가 전신이다. 대비사는 대비갑사(大悲岬寺)로도 불리는데, 고려 때 지금의 자리로 옮겨와 오늘에 이르고 있다.

대법사는 대포산 기슭에 위치한 사찰로 명성황후의 출생 일화가 전해진다. 고즈넉한 사찰 곳곳에 심어진 꽃나무와 연지가 있어 아름다운 경관을 감상할 수 있다. 대법사는 1971년에 창건됐으며 역사가 오래되지 않은 사찰이다. 하지만 원래 이곳은 창건 시기는 정확하지 않으나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진성여왕 때부터 절이 있었다고 전한다. 창건 당시 0. 9m의 미륵입상을 조성해 미륵당으로 불렸다고 한다.

순창 대모암은 백제 시대의 산성터인 순창 대모산성 북쪽에 자리한 사찰이다. 학성이 1933년 창건한 곳으로, 6·25 전쟁 때 거의 폐사되다시피 했다가, 1973년 법당을 중수하였으며 1985년 범종각을 지었다. 1993년에는 대웅전을 새로 지었다. 대모암은 대웅전, 범종각, 요사채 2동으로 구성되어 있다. 대웅전은 팔작지붕에 정면 3칸, 측면 2칸의 목조 건물이다.

구미 대둔사는 건축기법와 양식으로 보아 조선 후기인 17세기에 세운 것으로 추정되며 석가여래좌상을 본존불로 모시고 있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대웅전과 명부전, 응진전, 삼성각 그리고 3동의 요사가 있고, 조선 후기 사찰 건축의 연구에 중요한 자료인 대웅전과 대웅전 내부에 있는 건칠아미타여래좌상이 있다. 신라 눌지왕 30년(446) 아도화상이 세웠다는 설이 있으나,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다.
암각화란 선사시대 사람들이 바위나 동굴벽에 기호나 물건, 동물 등의 그림을 새겨놓은 것을 말하는데, 주로 농사의 풍요와 생산의 의미를 지니는 주술행위의 결과물로 보인다. 대곡리암각화는 봉황대로 불리는 구릉의 정상 부근 암벽에 새긴 것으로, 호남지방에서 유일한 선사시대의 암각화이다. 암각화는 두 곳에 위치하고 있는데, 크기는 1∼2m 내외이며, 상하 혹은 좌우 대칭으로 기하학적인 문양을 새겼다.